어영부영 연말이 다가왔다. 올해에 한 것도, 이룬 것도 없는데 벌써 내년이네. 작년에 했던 생각에서 한 톨도 달라지지 않은 문장을 떠올린 민이정이 하품을 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해가 중천에 뜨다 못해 약간 기운 시간으로,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민이정의 불규칙한 생활로 직접 사료를 챙겨주지 못한 탓에 들여놓은 자동 급식기 앞에 엎드려 있던 버터가 벌떡 일어나 민이정의 뒤를 쫓아왔다. 민이정은 저를 쫓아오는 버터를 돌아보고,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서 터벅터벅 걸어 주방에 들어섰다. 며칠 전, 동짓날이라고 냉장고에 입성한 팥죽이 보였다. 딱 한 끼 먹을 분량으로 채운 밀폐 용기 하나. 그건 민이정의 집에 오래 드나들어 그의 입맛이 짧은 걸 아는 가사도우미인 안 여사가 둔 것이었다. 원래 팥죽은 두 끼분이 있었지만, 그중 한 끼분을 먹고 남았다. 그냥 시리얼로 때울지, 아니면 팥죽을 먹을지, 그도 아니면 안 여사가 만들어둔 다른 반찬으로 밥을 먹을지 고민하던 민이정은 결국 팥죽을 꺼냈다. 하얀 그릇에 옮겨 담은 죽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린다.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보며 묶지도 않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만졌다. 오래 자서 머리가 좀 멍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일찌감치 약을 먹고 잔 덕이었다. 그래도 몸은 개운했다.

독한 약이라 그런가. 효과 직빵이네. 민이정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반쯤 돌아간 전자레인지를 본다. 기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멍한 머리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오늘치 원고는 미리 당겨 썼다. 2022년의 마지막 날에는 일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 그럼 원고는 보지 않아도 되고. 남은 일은 느긋하게 연말을 즐기는 일이었다. 마침 하려고 남겨둔 일도 있었다. 사실 남겨둔 일이 아니라 하려고 계획한 일이 맞을 것이다. 민이정은 과거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땡 소리와 함께 전자레인지가 작동을 멈췄다. 민이정은 오븐용 장갑을 끼고 팥죽이 든 그릇을 꺼내 식탁 위에 가져다 두고, 수저도 챙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 것은 식탁 구석에 놓인 소금을 집어 팥죽에 툭툭 치는 일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자연히 민이정 몫의 팥죽은 달지 않았다. 소금으로 간을 한 팥죽을 슬슬 저었다. 팥은 곱게 갈아 걸러냈고, 대신 밥알과 새알이 팥 알갱이의 자리를 대신했다. 막 꺼내온 팥죽이 너무 뜨거워서 수저로 뒤적여댔다.

민이정은 실내복 주머니에 대충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내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괜히 액정을 켜봤다가 시간만 확인하고 껐다. 까맣게 어두워진 액정에 제 얼굴이 비치면 그걸 잠시 보다가 수저를 다시 움직였다.

어느정도 식은 팥죽은 꽤 맛있었다. 안 여사의 음식솜씨가 좋았던 탓에 흠잡을 데 없었다. 부드러운 팥죽과 쉽게 뭉개지는 밥알과 녹진하게 흐물어진 새알심이 어우러졌다. 소금 간은 적당히 되었고. 사실은 조금 싱거운가 싶었지만, 이 이상 넣으면 짜질 것이 분명해서 더 넣지 않았다. 민이정은 이따금 스마트폰을 흘끔거리며 부지런히 팥죽을 먹었다.

류해원은 바쁜 모양이었다. 지난 번에 다녀간 이후로 연락이 없어 바쁜 거구나 생각했다. 메시지를 남겨볼까도 싶었지만 관두었다. 어지간하면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니 정말 바쁜 것 같았다. 얼굴에 철판 깔고 연락할까도 싶었지만, 글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건 핑계다. 민이정은 사실 문득 무서워졌을 뿐이었다.

팥죽을 세 숟갈 정도 남기고 멍하게 있었다. 정신차려보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뜨지 않은 채 꺼진 액정을 보는 자신을 깨닫고 다시 팥죽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별로 기다리는 건 아냐.’ 속으로 생각했다가, ‘사실은 기다리는 게 맞지.’ 속으로 인정한다.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했다가 인정하고, 다시 부정했다가 인정하길 반복했다. 그렇게 한다고 있는 사실이 달라질 것도 아닌데도.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다른 생각을 하며 먹었더니 배부른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들어갔다. 팥죽이 목구멍까지 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토할 것처럼 배부르다…. 중얼거리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늘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또 드는 생각이 이거였다. ‘정말 많이 바쁜가? 연락도 못 할 정도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미쳤지, 민이정.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릇과 수저를 한 번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집어넣은 다음 터벅터벅 주방에서 빠져나왔다. 버터가 졸졸 따라왔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민이정이 버터를 돌아봤다. 그리고 곧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버터와 눈을 마주쳤다. 개의 까만 눈에 민이정이 가득 담겼다.

“버터. 이따 밤에 나갈 건데 그래도 산책 해야겠지?”

개는 산책 얘기에 귀를 쫑긋거리고 꼬리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민이정은 그걸 보고 힘없이 웃었다. 그래, 요령을 피울 순 없지. 읏샤, 하고 몸을 일으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좀 정리해야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를 빗지도 않고 묶지도 않았더니, 아주 그냥 산미치광이 꼴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정리하고 내려왔을 땐 버터가 이미 현관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매번 가는 산책인데 개는 늘 그걸 너무 좋아했다. 개들은 다 그런 것 같았다. 적어도 민이정이 경험한 개들은 그랬다. 민이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리드줄과 가방을 챙겼다. 해지기 전에 얼른 다녀와야지.




산책은 예정보다 훨씬 길었다. 날이 며칠 전보다 포근했기에 조금 더 오래 걸었다. 개는 행복했고, 인간은 조금 지친 채로 집에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는 어느새 어두워진 후였다. 겨울은 해가 짧았고, 밤이 이르게 찾아온다. 저녁 일곱 시가 지날 때도 해가 남아있던 여름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겨울에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으면 곤란하겠다만. 민이정은 발을 깨끗이 씻긴 개를 집안에 풀어두고 거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스스로를 널어놓은 시래기 따위로 생각하면서 사지를 늘어트리고 있다가 또 괜히 스마트폰을 들어 액정을 켠다. 드문드문 연락이 온 것도 있었지만 연말이라고 안부 메시지가 온 것들이 전부였다. 기다리던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사람이란 이토록이나 어리석다. 기대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기대하고 만다니.

민이정은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다가 그것을 쥔 채로 팔을 아무렇게나 늘어트렸다. 죄 없는 천장만 노려보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이러고 있을 바에야 그냥 지금 움직일까? 아냐. 지금 움직이면 가서 뭐해? 할 것도 없이 하염없이 앉아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고 있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는 리모컨을 집어 TV를 켰다. 평소 보지도 않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삐딱한 얼굴로 봤지만, 머리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요란한 자막이 띄워지는 화면을 보자면 의미 없는 소음만 지나갔다. 그걸 보다가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떴을 때는 또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민이정은 연예대상 프로그램이 흘러나오는 걸 보고 TV를 껐다. 집안에 적막감이 돌았다.

“버터.”

부르는 소리에 개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다가와 고개를 쑤욱 내미는 개를 보던 민이정이 손을 뻗어 버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버터, 바다에 가자.”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그래서 시내는 제법 막혔지만, 외곽으로 나오니 좀 한산해졌다. 민이정은 어두운 도로를 달렸다. 버터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었다. 얌전한 개는 좀처럼 걱정하게 하지 않았다. 사고 치는 일은 곧잘 있었지만, 그것도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실 그래서 민이정은 버터가 ‘그곳’에서 온 개라는 걸 때때로 실감했다. 버터는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이상적인’ 개였으니까. 물론 완벽하게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버터는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지 아는 것 같았다. 그저 개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고, 와준 것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을텐데 이렇게까지 착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관뒀다. 이상적인 개건 말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애가 민이정의 가족이 되었다는 게 중요했지.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족.
민이정은 그걸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 유난히 더웠던 어느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이후로 가족이 생기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개를 잃었고, 부모를 잃었다. 슬픔은 연달아 찾아왔다. 그래서 다 시는 만들지 않겠다고 여긴 까닭도 있었고, 만들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민이정은 겁쟁이였고, 다시 개를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까운 사람이 생길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개가 안겨졌다. 사람도 함께였다. 민이정은 그게 제 인생에 둘도 없는 행운이라고 여겼다. 더는 욕심내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받았으니까.

민이정은 문득 담배가 당겼다. 류해원과 금연하기로 약속한 후, 입에 대지 않았던 담배가 유난히 생각났다. 차에 놓아두었던 금연 껌을 꺼내 입에 던져넣었다. 알싸한 맛이 혀를 감아도 담배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잘 참았는데. 민이정은 껌을 꾹꾹 씹었다.

전방을 노려보며 운전하는데 집중했다. 네비게이션이 이따금 알림을 던졌고, 그에 따라 핸들을 돌리거나 속도를 줄이고 높였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운전할 때만은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다. 아, 이 차. 그 사람 거지. 그걸 생각하면 또 울렁이는 것 같았다. 류해원은 무슨 생각으로 이 차를 뽑아서 운전해, 제게 맡긴 걸까. 아니,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인간, 의외로 천연계니까. 아니, 천연계라고 하는 게 맞나? 어쨌든 민이정이 본 류해원은 어딘가 맹하고 귀엽고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아방하다고 해야 하나…….

“…하, 또 그 인간 생각하고 있네.”

민이정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틈만 나면 류해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류해원. 어느 날 갑자기 민이정의 인생에 저벅저벅 걸어들어와서 울타리를 넘고 멋대로 자리 잡은 그 남자. 민이정은 그와의 거리를 어떻게 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밀어내고 싶은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그가 너무 깊게 들어오길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가오지 않으면 서운했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그렇지만 류해원은 류해원만의 속도로 민이정에게 다가왔고, 이제 그건 무를 수 없어졌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말하고 차가 멈췄다. 사방은 어두웠고, 저 높은 하늘에 뜬 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로등이 있긴 했지만 고장났는지 불이 나가 있어 있으나 마나였다. 민이정은 차 안에서 바깥을 보다가 뒷좌석에서 담요를 끌어왔다. 작은 것은 버터에게 덮어줬고, 큰 것은 제 것이었다. 담요를 덮은 채로 스마트폰 액정을 띄웠다. 2022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50초. 51초. 52초. 53초……59초. 그리고 날짜가 바뀐다.

민이정은 창 너머로 보이는 어둠을 응시했다. 그곳에 바다가 있을 것이었다. 창을 내리면 적막한 탓에 멀리의 파도소리가 선명했다.

“…해피 뉴 이어.”

류해원의 해원은 바다 해에 원할 원자를 쓴다고 했다. 이름에 원할 원자를 쓰면서도 그는 그리 욕심내는 법이 없었다.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는데, 그는 바다를 닮았지만 욕심쟁이는 아니었다. 좀 더 욕심내도 되는데. 그러면…….

여전히 류해원으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여전히 바쁜 걸까. 하긴 연말연시는 누구나 바쁘다. 저 같은 아웃사이더야 바쁠 일이 없지만, 그는 바쁠 것이다. 바쁘지 않은 때가 드물기도 할 것이고. 민이정은 파도소리를 한참 듣다가, 추워서 몸이 떨릴쯤 되면 창을 올려 닫았다. 금세 차 안은 적막해졌다. 아니, 사실 그리 적막하진 않았다. 버터가 코 고는 소리가 들린 탓이다. 개는 세 번에 한 번은 코를 골았다. 그게 얼마나 귀엽고 웃긴지. 버터 쪽을 힐끔 봤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본다. 액정을 켠다. 2023년 1월 1일. 그 날짜를 보고, 메시지함을 본다. 새로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민이정은 잠시 메시지창을 켜고 몇 마디를 적다가 지우고, 적다가 지우고를 반복했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바다에 오자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충동이었다. 좀처럼 장거리 운전을 하는 법이 없는 주제에 겁도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충동에 충동이 따라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30일에 계획했고, 일을 마쳤다. 준비도 끝냈다. 31일이 되니 그 계획을 실행해서 여기에 왔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히키코모리 오타쿠 프리랜서답지 않은 결심이었다. 하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오지 않을 것이었다. 또 몇 년이고 일출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생각해보면 바다에 다시 온 이유도 다 류해원 때문이었다. 악마의 무대 위에서도, 돌아온 후에 같이 밤바다를 보러 왔을 때도, 버터와 단둘인 지금도. 두 번은 류해원이 곁에 있었고, 이번에도 류해원 탓이었다. 민이정은 제멋대로 저질러놓고서는 류해원 탓이라고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생각도 않았을 것이다.

민이정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다. 멍하니 머릿속을 비우는 건 민이정이 잘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진 못했다. 또 류해원의 생각이 불쑥 치민 탓이다. 요즘 내내 이랬다. 가만히 있자면 틈틈이 류해원의 생각이 치밀었다. 하다못해 민이정은 자신의 필명만 봐도 그가 생각날 지경에 이르렀다. 류해원이 단팥찐빵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작가 단팥찐빵 말고, 먹는 단팥찐빵. 사실 류해원은 작가 단팥찐빵도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민이정은 그 ‘좋아한다’라는 말에 크게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공연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어 오르면 실수할 수 있으니까.

중증이군. 민이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잘 도착했을까. 도착한 유리 램프와 크리스마스 카드에 의하면 그는 지금 바티칸에 있다는 모양이었다. 바티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흔히 성당의 그것이었고, 실제로도 아마 비슷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 곳일 테니까. 게다가 그는 성탄 미사에 참석한다고 했으니.

민이정은 류해원의 겨울이 춥지 않길 바랐다. 그에게 보내는 선물도 그런 의미였다. 옷 같은 것보다는 장갑을 선택했다. 그는 손을 많이 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왕 보냈으니 잘 써주면 좋을 텐데. 그 외에도 민이정의 생각은 줄줄이 이어졌다. 갑자기 한국에 들어온 류해원과 영화를 본 일이라던가, 그와 통화를 하거나 메시지나 편지, 메일을 주고받던 것, 입을 맞춰서였던지 미처 바래다주지 못한 때 같은 것들. 그를 그리 오래 알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따지고 보니 알게 된 지 꽤 됐다. 하기야, 가을쯤에 처음 만났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 민이정은 맥락도 없이 중얼거렸다. 곧장 핸들에 머리를 박았으나 다행히 클락션은 울리지 않았다. 핸들 중앙에 머리를 박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민이정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귀가 달아올랐다. 핸들에 이마를 댄 채로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미칠 노릇이었다. 중중이고, 환장하겠다.

민이정은 이제 슬슬 인정해야 했다. 이대로 부정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민이정은 류해원이 조금 더 욕심내줬으면 했다. 저를 붙잡아줬으면 했다. 자신이 그에게 먼저 마음을 말하기엔 용기가 없던 주제에, 류해원이 그렇게 저를 원해주기를 바랐다. 같은 마음이었으면 했다. 그를 원해서 두려워졌고, 두려워졌기에 알고 싶었고, 알고 싶기에 두려웠으며, 그래서 붙잡고 싶었다.

그걸 인정하니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새해에는 뭐든 해내야지 생각했는데, 처음 해낸 것이 마음의 인정이라니 우습기도 하지. 하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옷을 잘 여미고 담요를 내려놓으면, 잠들었던 버터가 고개를 들었다.

“버터, 슬슬 나가보자.”

시간을 보면 이제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민이정은 버터에게 리드줄을 걸어주고 함께 차에서 내렸다. 사방은 아직도 어두웠다. 민이정은 그 어두운 해변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백사장은 넓었고, 저 멀리 가로등이 비추는 빛으로 기다란 모래사장이 펼쳐진 걸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류해원과 함께 왔던 곳이기도 했다. 민이정은 문득 생각난 것에 가방을 봤다. 그때 하고 남은 스파클라가 남아있었다. 그걸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내버려 두고 버터와 함께 걸었다.

고요한 새벽의 해변에는 파도소리만이 가득했다. 외진 곳이라 민이정 외의 다른 사람은 없었다. 버터 외의 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이정은 파도 앞을 따라 걸었다. 물이 밀려들어 왔다가 물러나고, 다시 밀려들어 온다. 철썩이는 소리는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류해원이 언젠가 어두운 밤바다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민이정은 이제 그에게 밤바다에 대해서 이 야기 할 수 있었다.

있잖아, 나 혼자 밤바다에 왔어. 정말 조용하고, 세상에 나 밖에 없는 것 같고, 기분 이상하더라. 나는 말이야,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

문득 서서 파도를 본다. 파도소리 사이로 익숙한 벨소리가 울려퍼지면, 민이정은 전화를 받았다. 

[“이정 씨, 안녕. 해원입니다.”]

류해원이었다. 민이정은 놀라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보고 싶다고 생각한 말이 닿았을까? 아니면 당신도 내가 보고 싶었을까?

“응, 해원 씨도 안녕.”

그동안 바빴나 봐. 전화를 통 못해서…, 하고 말하는데 그의 뒤쪽으로 소리가 요란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런데 이거 무슨 소리야?”

류해원은 곧 억지를 부린다. 일하는 도중이라면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댄다. 나중에 걸겠다고 하기 싫었댄다. 괜찮을 거라고, 조금은 다칠지도 모르지만 죽지는 않을 거라고. 아니, 그게 말이 돼? 다치지도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류해원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류해원의 말은 부드럽게 이어졌으나 그 내용은 달랐다. 그건 어쩐지.

[“이정 씨.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고 싶어요.”]

고백같았다. 민이정은 침묵한다. 이제 너머에서는 더 이상 비명이나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 민이정이 말하지 않으니 류해원도 말하지 않는다. 꼭 민이정의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민이정은 저 멀리 바다를 봤다.

“…해원 씨.”
[“네, 이정 씨.”]

어디부터 말하면 좋을까. 나는 겁쟁이라는 거?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거? 당신이 후회할 거라는 거? 당신은 어쩌면 바보 같은 소원을 빌었고, 그걸 저는 물러주지 않을 거라는 거?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을 접어두고서.

“사람의 외로움이라는 건, 사실 채워지지 않는 거야.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다르지 않지.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고, 그래서 영영 이해받을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이해하는 척, 궤도를 따라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위성 같은 존재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말이야.

“완전히 맞지 않더라도, 당신이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

당신은 이미 내 머릿속을 멋대로 드나들고 있고, 나는 그걸 내버려둘 수 밖에 없어. 좀 더 욕심을 내도 괜찮아. 그러면. 그렇게 하면.

“나는 기꺼이 붙잡혀줄테니까.”

저 멀리,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혀가 어둠을 가르고 떠오른다. 민이정은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있을 곳과 이곳의 시차는 여덟 시간. 그러니까 그는 아직 2022년 12월 31일에 있을 것이다. 단 몇시간, 어쩌면 하루, 또는 1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대화하고 있었다.

“내 옆으로 와.”

그럼 내 모든 걸 줄게.
밀려드는 파도 앞에 서서, 민이정은 어쩐지 목이 메어서,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구름 없는 하늘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이걸 같이 봤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고, 당신이 보고 싶어. 속삭이면서.

2023년 1월 1일. 첫 여명 앞에서, 민이정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민이정은 류해원을……….

 

 


 

이걸 로그로 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요............................

어카냐............................ 저 해원씨를 사랑해요.............................................................................................

민이정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란님을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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