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잘 될 거야.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말은 이미 버릇이었다. 그렇게 괜찮다고 중얼거리는 말은 곧 괜찮지 않을 때의 자위로, 너울너울 밀려드는 불안감을 애써 밀어내기 위한 주문이었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괜찮다고 말한다면 정말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다 옛일이라, 그렇게 바란다고 해도 이뤄지지 않을 일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주문처럼 외는 건 버릇이었고, 껍데기였다.
베개를 끌어안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려 밤을 지새웠다. 깜박깜박 졸음이 와서 눈을 감았다가도 오래지 않아 뒤척였다. 깜박. 깜, 박.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긴긴 밤 참았던 숨을 푹 내쉬었다. 밤새 자고 깨기를 반복했으니 침대에 누운 것이 소용없을 정도로 피로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얻어맞은 것처럼 쑤시고 욱신거렸다. 깜박거리는 눈은 뻑뻑하게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안약 같은 게 필요한데. 일어나 움직이지도 않을 거면서 피로에 몽롱한 머리로 희미하게 생각했다. 이상할 정도로 괴로웠다. 잠을 지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지난 밤 누운 이래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아침이 오긴 했을까? 21일로 돌아왔으니 이제 22일이겠지? 자고 싶지만 잠에 들 수 없었고, 허기가 지는데 배는 고프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하더라. 참담하다? 그러나 슈가는 실소했다. 자신이 이 상황을 참담하다고 말할 주제나 되던가.
머릿속에서 뒤엉킨 기억들이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같은 일들이 네 번. 아니 네 번이 맞나?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기억이 있었고, 그럼에도 그것은 제 기억이었다. 제 것이되 제 것이 아닌 기억이 어지러웠다. 혼란한 머릿속으로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분명 있었다. 자신은 수없이 이 자리에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들인 시두스는 사실 오지 말았어야 할 곳이었다. 마들린에게도, 하트에게도 이곳에 와선 안 된다고 얘기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시두스로 가라고 했던 건 슈가 자신이었고, 로건에게 베아트리체를 점검할 겸 마들린과 하트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권했던 것도 슈가 자신이었다. 더불어 쳅투에서 그들을 끌어들인 것도 슈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옥타비오는 자신이 끌어들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였으나 그게 위안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스스로 위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었다.
슈가는 여전히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어쩐지 자신의 잘못 같았다. 그 누구도 슈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고, 윽박지르지도 않았지만 슈가는 10개월 전 쳅투에서부터 지지부진 끌고 온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그 말 한마디가 슈가가 할 수 있는 변명의 전부였다. 물론 그런 죄책감을 꺼내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말해 ‘괜찮다’는 말을 듣는 건 더 죄스러웠다. 그 말을 듣기 위해, 면죄부를 얻기 위해 꺼내 보이는 죄책감이 아니라 할지라도 죄스러웠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견디지 못해 자신의 죄책감을 꺼내보였을 때 로건이 한 말이었다. 그땐 대답할 수 없었다. 형, 하지만 내가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형은 지금쯤 이런 상황에 처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발랄하기 짝이 없어 그늘 한 점 없이 밝은 슈가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기 위한 모습이었다. 슈가가 자란 고아원의 원장도, 슈가를 키워낸 양부모도 슈가에게 그런 모습을 바랐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슈가는 기꺼이 그런 모습을 내보였다. 물론 본래 슈가의 성격이 그리 음침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성격과 모습이 아주 없는데서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바탕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늘 어느 한편으로는 전전긍긍했다. 순진한 척. 해맑은 척. 걱정 없는 척. 생각 없는 척. 그렇게 척, 척, 척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슈가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이게 정말 척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뒤집어쓴 껍데기와 내보이고 싶지 않은 속의 경계가 묘연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 껍데기를 다시 고쳐 썼다. 만지면 보들보들 설탕실로 지은 솜사탕 껍질 아래 든 것이 비 냄새나는 어린애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뒤집어쓴 껍데기가 언제고 깨질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 그때가 지금일지도 몰랐다. 저들을 끌어들여서 이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죄책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감. 죽는 순간의 두려움이나 고통도 끔찍했지만 그보다도 참을 수 없는 건 죄책감과 무력감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한 참담함이었다. 이제 백세 번째로 돌아온 22일을 모두 기억하진 못했다. 그러나 벌써 네 번째였다. 네 번. 네 번의 기억이 있었다. 이 네 번을 뺀 아흔아홉의 기억은 하지 못했지만 그 아흔아홉 번의 같은 나날에 자신은 아흔아홉 번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흔아홉 번 죽었을 것이며, 아흔아홉 번 무력하게 손 놓고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허나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슈가는 고작 네 번이었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고작 네 번을 기억하는 슈가도 이토록이나 괴로운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상상하고 싶지도, 가늠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슴속이 묵직하고 답답하며 끔찍했다. 그렇기에 로건도 마들린도 왜 기억해낸 거냐고 했을 터다. 이 상황에 처하게 된 시발이 된 게 슈가 자신임에도 탓하지 않고 염려하는 그 상냥함에 슈가는 목이 메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홀로 잊고 편해지는 일 따위를 어떻게 하겠나. 하지만 사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아마 모를 테지.
사실 잊고 싶지 않은 건 당신이 내준 한 조각 온기, 한 조각 따스함이라도 잃고 싶지 않아서였음을 모르겠지.
(BGM 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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