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뜨거운 물로 씻고 나자 나른함이 몰려들었다. 거울에 달라붙은 수증기만큼이나 미지근한 한숨을 뱉으며 더듬더듬 뻗은 손으로 수건을 찾았다. 손끝에 걸리는 보송한 수건을 끌어 젖은 몸을 닦아내고 한쪽 벽에 걸린 가운을 들어 걸쳤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유달리 추위에 약한 몸은 겨울에는 늘 삐걱대곤 했다. 방심해서 감기라도 걸렸다간 꼼짝없이 병원신세를 지게 될 테니 더 신경 써야 했다. 감기가 아니더라도 폐렴에 걸릴 수도 있었고. 천식이 고질병인 만큼 기관지가 약했으니 신경 쓰는 일은 당연했다지만 사실 간절하진 않았다. 그건 ‘나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한 발상은 아니었다. 세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들에게 사소한 병으로도 몇 번이나 죽을 뻔 했고, 지금껏 살아있다는 사실이 거의 기적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세진이 태어난 이 집이 부유했고, 또 부모가 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썼다는 것 그 두 가지가 있어서 세진은 살아있었다. 아직도.


 희뿌옇게 흐려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다가 몸을 빙글 돌려 욕실을 나섰다. 욕실 입구의 발매트 위에 올라서서 물기를 꼭꼭 닦고 나서야 타박타박 걸었다. 욕실과 방은 바로 연결 되어 있었고, 세진은 자연스레 바로 보이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졸린데 곧장 누울까. 눈꺼풀이 묵직한 걸 느끼며 양손바닥으로 양 눈꺼풀 위를 꾹 눌렀다. …아니. 아직은 아니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세진은 도로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묶지 않고 풀어헤쳐두었던 가운을 그제야 가다듬고 허리끈으로 꼭꼭 여몄다.


 일어나서 곧장 다가간 곳은 책상이었다. 짙은 색 오크목으로 만들어진 책상 위는 깔끔했다. 손댈 곳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 위에 나와 있는 것은 얇은 동화책 하나로, 검은 하드커버 위에 금박의 글씨로 제목이 박혀있었다. 밤의 이야기. 겨우 스무 페이지 남짓의 얇은 동화책은 어딜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동화책 치고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페이지가 좀 딱딱한가? 어린이를 타깃으로 내놓을만한 디자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칠흑처럼 새카만 표지는 묘하게 손이 갔다. 인간의 물건이 아니라서인지도 모르지. 중얼거림을 삼키며 표지를 넘기면 역시나 새카만 배경에 덩그러니 금색과 빨간색으로 장식된 보석상자가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장난감상자일지도 모른다. 세진은 그걸 보다가 검지 끝으로 톡 상자를 건드렸다. 당연하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자를 친 손가락이 몇 장인가의 페이지를 술술 넘겼다. 책장 속 상자가 열리고, 조그만 소녀가 상자가 그려진 페이지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사뿐사뿐 걸어 다가왔다. 상자 앞에 선 소녀는 물끄러미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양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고 깔깔대고 웃었다. 책 그 어디에도 글자 하나 없었지만 책장 속의 소녀가 깔깔대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세진은 그게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동화책 속 소녀는 그 길고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뽐내며 상자 주위를 빙빙 맴돌다가 이내 등을 보인 채로 우뚝 멈춰 섰다. 두어 장을 더 넘겨도 소녀는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으로 넘겼을 때 소녀가 돌아봤다. 샛노란 호박색의 눈동자가 책 너머 세진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쳤다. 세진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소녀를 보다가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다시 소녀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미 페이지 수는 스물을 훨씬 넘겼으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소녀는 문을 열고 조그만 인형들을 들여왔다. 그 중 한 인형과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하고, 목에 목줄을 걸어 움직였다. 소녀는 무대를 만들고, 소녀와 약속을 한 인형은 무대 위에서 다른 인형들과 손에 손을 맞잡고 춤을 췄다. 인형들의 목이 떨어지고, 배가 갈라지고, 팔다리가 잘렸지만 인형들은 계속 움직였다. 무대의 막바지, 소녀와 약속했던 인형이 무대 가운데서 목을 매달았다. 무대가 무너지며 인형들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세진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으나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것들을 끝까지 봤다. 인형들은 계속해서 죽었고, 계속해서 살았다. 무대 위에서 불에 타올라도 되살아났고, 믹서기에 갈려도 되살아났다. 짓이겨져도 그랬다. 죽고 살아나고, 죽고 살아나고, 죽고 살아나고. 인형들의 움직임이라지만 그건 아주 참혹했다. 한참을 넘기고, 넘기고, 넘기던 세진은 문득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살랑. 등 뒤에서 매섭고 싸늘한 바람이 밀물처럼 밀려와 다리를, 어깨를 덮쳤다. 세진은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요즘 흉흉한 얘기 도는 거 못 들었어요? 혼자서 밤마실은 위험할 텐데요.”


 세진이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돌아서면 바로 보이는 창문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보고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했다. 건네는 말의 상대는 조그만 소녀로, 방금 전까지 세진이 보고 있던 동화책 속의 그녀였다.


 “뻔히 알면서 입에 발린 말 하긴.”


 물론 듣기 싫은 건 아냐. 소녀의 모습을 한 악마는 키득키득 웃으며 활짝 열린 창문 아래서 세진을 응시했다.


 “관심 없다더니 거짓말이었구나?”

 “악마란 존재는 증명되지 않았잖아요. 자주 보는 헛것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거랑 동일시하면 서운한걸.”


 내용과는 달리 전혀 서운하지 않은 투였다.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거지. 세진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믿지 않는다는 거 알고 접근한 거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런 책이나 주고.”


 톡톡. 세진의 검지가 동화책 위를 두드렸다.


 “이런 걸 본다 한들 믿을 것 같아요?”

 “하지만 믿고 있잖아. 아냐?”


 웃음기 어린 말에 세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믿지 않았다면 기척을 느꼈다고 해도 대꾸하지 않았을 테니까.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곧 픽 웃었다.


 “잘 아시네요.”

 “난 악마니까. 숨길 생각도 없는 거짓 따위 뻔히 보이거든.”


 뒤에서 부는 바람에 악마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문은 좀 닫아주면 좋겠는데. 역시 악마라 남을 배려할 줄 모르나?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대신 세진은 헐렁한 가운 앞섶을 조금 더 여몄다.


 “그런 시답잖은 말은 관두죠. 그래서 왜 제게 접근하는 거죠? 악마니까…. 그래요, 흔한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유혹이라도 해서 타락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아니면 계약 같은 거?”

 “아니. 나는 이미 계약자가 있어. 계약자도 아닌 널 유혹할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그럼 왜 자꾸 나타나는 거죠? 악마란 존재에게 관심이 가긴 하지만 계약해줄 것도 아니고. 당신도 제게 뭔가를 할 생각도 없다면 제 앞에 나타날 이유도 없잖아요.”


 전 생각보다 바쁜 사람이에요, 악마씨. 느긋한 말에 악마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래,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들어봐, 한세진. 나는 널 즐겁게 해줄 수 있어. 그리고 너도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지. 어쩌면 너는 네가 지금껏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도 있고, 네가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걸 이룰 수도 있어.”


 건네는 말은 다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진은 악마의 말에도 고개를 갸웃 기울일 뿐 크게 혹한 기색은 없었다.


 “예를 들면요?”

 “이를테면 네가 익히 보지 못한, 사람들의 새로운 모습도 볼 수 있겠지. 절망이나 증오, 공포와 같은 것들.”


 세진은 악마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악마도 세진을 찾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악마는 세진을 알고 있었다. 자라온 환경, 성격, 생각부터 시작해 그 모든 것들을. 세진 혼자만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한 것들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악마의 권능 중 하나였다.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에 적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가 내뱉은 말은 세진의 마음을 간질였다.


 “…재밌는 소리를 하시네요.”


 멀뚱히 악마를 보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절망. 증오. 공포.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 세진은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진이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세진에게 사랑은커녕 지나가는 길고양이에게 건네는 관심만큼의 정 한조각도 내어주지 않은 부모조차 싫어하지 않았다. 세진은 날 때부터 사람을 미워할 줄 몰랐다. 모두를 좋아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세진은 모든 게 궁금했다. 자신이 애정을 주는 만큼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의 그 너머 숨기고 있는 모습들을. 그런 생각을 하게 된지는 오래 되었다. 세진 스스로도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알았다고 한들 그걸 고쳐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으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게 내보인다면 곤란한 일이 생기리라는 것 정도도 알고 있었다. 매도당할지도 모르고, 치료가 필요하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껏 꼭꼭 숨기고 숨겨왔었건만, 눈앞의 악마가 그렇게 숨겨온 자신을 자극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없나? 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악마를 보고 빙긋 미소 지었다. 일단 들어보는 것도 좋겠지.


 “그래서 제가 그걸 볼 수 있다고요? 악마씨?”

 “물론. 그것도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네 기획 하에.”


 악마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악마와 만나서 그녀에게 악마와의 계약법을 들었다고 해도 일상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세진은 여전히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이미 다른 누군가와 계약을 했다는 악마는 세진에게 방법과 길을 알려줬을 뿐, 계약을 하지 않았다. 악마의 말은 흔히 묘사되듯 달콤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말이 달콤하고, 또 계약을 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줬다고 한들 정작 계약을 할 악마가 없었다. 악마란 존재는 길에 널린 것도 아니었고, 혹 근처에 있다하더라도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이 먼저 접근하는 때도 있다고는 하나 어떻게 그들을 꼬여낼 수 있을지 그건 알지 못했다. 세진을 찾아왔던 그 악마, 율리시즈도 말했다. 악마란 존재는 본질이 각자 다른 만큼 그들이 바라거나 원하는 혹은 관심을 가지는 인간도 모두 다르다고. 어쩌면 좋을까. 율리시즈가 한 짓은 어린 아이에게 잔뜩 바람을 넣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기로 조금만 가면 네가 바라던 꿈과 환상의 유원지가 있어. 그렇게 속삭여놓고 다가가면 정작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높은 성벽이 솟아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악마는 대체 뭘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나. 전전긍긍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가? 뭘 위해서? 세진은 율리시즈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단순이 이런 조그만 재미를 위해서 자신에게 접근했으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따로 있을 것이다. 이보다도 더 크고 화려한, 이를테면 무대 같은.


 그렇지만 다가갈 수단이 없어. 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삼켰다. 어쩌면 좋을까. 방법이 없나? 아니면 악마가 또 다른 덫을 마련해 두었나? 예상컨대 방법이 없진 않을 것이다. 악마는 아마 방안을 마련해뒀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그렇게 접근할 리가 없었다. 달콤한 말로 홀리고 그 후에 덫에 빠지도록 손을 쓸 터다. 그건 비단 악마만의 방법은 아니었다. 인간도 그런 식으로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이곤 하니까. 누가 덫을 만들던 그 미끼는 달콤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사냥감이 의심할 겨를도 없이, 혹은 의심하면서도 홀려 덫에 빠질 테니까. 세진은 이 덫에 발을 들일 의사가 있었다. 악마의 말은 달콤했고, 혹 그 끝에 뭐가 있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흔한 얘기로 영혼이라도 내어줘야 한다면 그럴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미련 없는 삶이었으니까.


 머리위에서 깜박이는 가로등불빛에 고개를 들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나? 눈을 깜박이며 점멸하는 가로등을 보다가 세진은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면 낯선 거리였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주택가에 덩그러니 선 세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소에 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잠시 서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대형서점은 걸어서 15분정도 걸리는 곳이었고, 오늘 세진의 체력과 컨디션은 좋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살살 다녀오기로 했다. 서점에서 시집 하나, 소설 하나, 문제집 하나를 골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이라니?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서 서점까지의 길은 세진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도 없이 다녀왔던 거리였다. 길을 잘못 들래야 잘못들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럴 텐데.


 세진은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앞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한 거리. 모르는 동네. 손목시계를 보면 시간은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진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천천히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 개인가의 가로등을 지났다. 세진의 키보다도 높은 담장과 담장이 이어지는 골목은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떤 집도 불 켜진 곳이 없었다. 새벽녘도 아닌데 모두가 잠든 것처럼, 혹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 건지.


 사실 휴대폰이 있으니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어도 되었을 것이다. 집에서 일하는 누군가에게라도 말한다면 분명 데리러 올 테고, 그러면 오래지 않아 집에 갈 수 있겠지. 아주 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세진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조금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이 기묘한 분위기의 거리가 궁금했기 때문도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에 무서울 법도 한데 세진은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러기야 했다. 세진은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두려움을 몰랐고 불안을 몰랐으며 분노를, 증오를 몰랐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싫어할 줄 모르고, 매사 모든 것에 감탄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의 이 기묘한 분위기마저도 불안하거나 두렵다기보다는 새롭고 신기하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흔한 도시전설 같은 건가? 악마도 있는 마당에 도시전설이 실존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아니면 악마가 부린 조화인가? 뭐가 어찌됐든 세진은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래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 탓이었다. 털썩, 하고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조용한 거리에서 선명하게 들린 소리에 세진은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들린 곳은 멀지 않은 골목이었다. 세진은 선 채로 골목 쪽을 주시했다.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뭔가를 떨어트리는 소리도 났다. 여기서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몸을 돌려서 왔던 길을 돌아가느냐, 아니면 모르는 척 지나가느냐, 그도 아니면 저 골목으로 다가가 소리의 근원을 확인해보느냐. 결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약 세진이 두려워하거나 불안했다면 오래 걸릴지 몰랐으나, 세진은 앞서 언급했듯 그런 걸 모르는 위인이었다. 그러니 결정은 빠르고 쉬웠다.


 “실례합니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요.”


 세진은 겁도 없이 골목으로 다가가며 천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골목 안쪽, 거의 꺼질 듯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새하얀 얼굴로 태연하게, 그러나 무표정하게 서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은 이제 스물 초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유령처럼 서서 세진을 바라보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뒤로 뭔가 보였다. 쓰러진 사람. 바닥에 구르는 커다란 돌. 돌은 기묘할 정도로 붉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도 그것만은 선명했다. 세진의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남자의 하얀 뺨에 튄 붉은 자국들. 셔츠도 붉게 얼룩덜룩했다. 원래 그런 무늬가 새겨졌다고 생각하기엔 부자연스러웠다. 세진은 눈을 한번 깜박였다. 남자는 미동도 없이 말간 눈으로 세진을 응시했다.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숨기려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다가 우연히 눈을 마주친 사람을 보듯 덤덤했고, 세진의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다 곧 남자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누구?”

 “지나가던 사람이요.”


 남자를 보며 세진은 빙긋 웃었다. 남자의 머리 위 가로등이 깜박, 느리게 점멸했다. 여전히 흐린 불빛 아래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 남자는 느리게 따라하듯 읊조렸다.


 “목격자니까 저도 죽일 건가요?”


 세진은 빙긋 웃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지나치리만치 태연한 물음이었다.


 “아니.”


 돌아온 대답도 비슷했다. 태연했고,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곧 제 뒤로 시선을 옮겼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쓰러져 있다. 남자는 잠깐 가늠하듯 생각하나 싶더니 다시 세진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곧 되살아나.”

 “…되살아나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세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응시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의아해하는 그 반응에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10분 지나면 다시 살아나니까…. 죽어도 죽은 거 아니고. 다쳐도 한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잖아.”


 그의 반응은 도리어 왜 이걸 모르냐는 듯 했다.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이는 것에 세진은 그를 빤히 응시했다. 남자의 말을 듣고 떠오른 것이 있었다. 지난날 악마가 말해준 무대에 대한 것들이었다. 악마의 무대. 그곳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던 것과 같은 규칙이 적용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지금 현실과 악마의 무대를 혼동하고 있는 걸까?


 “거짓의 악마를 알아요?”

 “…….”


 어쩌면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말하는 것이 정말 악마의 무대에서 쓰이던 규칙이라면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세진은 입을 다문 남자를 보며 연신 빙긋 웃어보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알고 있어.”


 가만히 세진을 응시하던 남자가 제 발치로 시선을 내리깔며 느리게 대답했다. 여긴 장난감상자잖아. 아직도, 나가지 못했어. 계속 여기에 있잖아. 모를 수가 없는 걸. 한탄하듯 한 목소리는 흡사 체념한 것도 같았다. 이 사람은 현실과 악마의 무대를 혼동하고 있었다. 아니, 아직도 악마의 무대 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무대에서 벗어난지 오래 되지 않았나? 아니면 망가져버렸을까? 세진은 이름도 모르는 이 남자가 안쓰러웠고,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부서진 유리인형처럼 위태롭고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 악마의 무대에 올랐던 사람은 다 이렇게 되는 걸까? 모두는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해도 개인차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이 사람처럼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제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진은 눈꼬리를 휘어 웃고서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제 발치만 내려다보던 남자의 시선이 세진에게 닿았다. 살의도, 경계도 없는 말간 눈동자였다. 악마가 심어놓은 불씨가 금세 가슴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악마의 무대. 기획하는 게 자신이라면, 악마의 무대를 이용해 내놓을 수 있는 결과물이 이 남자와 같다면, 아니 같지 않더라도 이렇게 부서진다면, 망가진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지.


 “이름을 알려줄래요?”


 미소 지으며 묻는 말에 남자는 눈을 깜박였다. 의아함도 있었고 당혹스러움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입을 열었다.


 “민이헌.”

 “전 한세진이에요.”


 이헌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가선 세진이 늘어트린 그 손을 맞잡았다. 금세 차갑게 식은, 아직 붉고 끈끈한 게 묻어나는 손이었다.


 “제가 무대를 세울게요.”


 다 끝나면 당신도 내려갈 수 있도록. 방글방글 웃는 그 얼굴을 보며 이헌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악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게 악마라고요?”


 세진은 제 앞에 놓인 조그만 유리병을 들어 살폈다. 새파란 빛덩어리가 들어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의 빛덩어리로 눈이 부실 정도의 밝기는 아니었으나 형광등 아래서도 빛덩어리구나 정도로 인식할 정도는 되었다. 세진은 빤히 유리병 속의 그것을 보고 검지 끝으로 톡 유리병 표면을 두드렸다. 안에 둥둥 떠 있는 빛덩어리가 두드린 자리에 콩 하고 부딪혀왔다. 살아있어? 세진은 놀란 표정으로 빛덩어리를 봤다.


 “모방의 악마야. 그래서 형체가 없지. 그나마 그것도 네가 인식하기 쉽도록 겨우 형체화한 거고.”


 창문틀에 걸터앉은 거짓의 악마가 늘어트린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세진은 유리병 속의 모방의 악마를 보며 연신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꼭 그게 생각나네요. 호문쿨루스.”

 “연금술적인 의미로?”

 “네. 악마에 대해 알아보다보니 그쪽으로도 조금 찾아봤거든요. 별로 쓸모는 없다 싶었지만.”


 연금술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유리병 속에서 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유리병 밖으로 나오면 죽어버린다고 했던가. 잘 키운다면 아무런 가르침을 주지 않아도 지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그 생물은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모방의 악마와 같이 빛덩어리일지는 알 수 없다. 세진은 유리병 속의 얌전한 빛덩어리를 보다가 곧 거짓의 악마, 율리시즈를 돌아봤다.


 “그래서 이 애를 제게 보여주는 이유는…, 계약 때문인가요?”


 자신은 이미 계약을 했다고 했으면서 굳이 세진을 충동질한다는 건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악마와 계약하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더불어 모방의 악마라는 이 빛덩어리를 가지고 와 내보이는 것도 그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이 애는 계약을 하기엔 좀 어려워보이는데.”

 “인간의 기준에서 생각을 하면 쓰나. 그럼 조금 더 설명해 줄게. 이 애는 모방의 악마야. 무언가를 모방해서 그 모습을 취할 수 있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어.”


 율리시즈는 흔들던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세진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유리병 속 빛덩어리를 봤다. 그렇단 말이죠. 알 것 같았다.


 “이름은요?”

 “없어.”

 “…흠.”


 단호한 대답에 세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이 없다고? 왜인지 알 것 같긴 했다. 세진은 다시 유리병을 살살 만졌다. 유리병의 입구를 막은 코르크마개를 엄지 끝으로 문질렀다.


 “제가 만약 이 애와 계약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저 네가 보고 싶은 것들을 보지 못할 테고. 나는 네게 기대했던 것들이 전부 소용없어질 테지. 그 애는 다시 수라장 같은 악마들의 연회로 끌려 나갈테고 말이야.”


 연회? 세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율리시즈를 봤다. 여전히 창틀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소녀는 방긋 예쁘게 미소 지었다.


 “지루한 삶에 지쳐 여흥을 찾는 악마들의 연회. 가봤자 재미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모방의 악마 같은 게 나타난다면 좀 달라져. 제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모방의 악마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악마들의 장난감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한입거리 식사가 될 테지.”

 “그건 비극이네요.”

 “그렇지? 하지만 그게 네 결정에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걸 알아. 그리고 네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


 재밌는 계약을 하길 바랄게. 악마는 다정하게 속삭이고서 그대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처럼 텅 빈 창문틀을 보던 세진은 픽 웃었다.


 “정말 제멋대로인 악마라니까. 악마니까 당연한가?”


 세진은 침대에 앉은 채 시트 위에 내려놓은 유리병을 응시했다. 이름 없는 모방의 악마. 계약. 악마의 무대. 생각은 길지 않았고, 세진은 그대로 몸을 옆으로 뉘였다. 모로 누운 채로 코앞의 유리병을 보다가 검지 끝으로 다가 톡톡, 유리병 표면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빛덩어리가 대답하듯 또 콩콩.


 율리시즈가 말한대로 악마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약을 해야 했다. 준비도 해야 했으며, 구상도 해야 했다. 배우를 고르는 일도 게을리 할 순 없지. 하지만 그 전에…. 세진은 유리병 속 빛덩어리를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널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모방의 악마라고 부르기엔 너무 정 없고. 대신 이름을 지어줘도 될까?”


 유리병 속 빛덩어리가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흡사 대답하는 것처럼, 끄덕이는 것처럼 하는 꼴에 세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그럼 뭐가 좋을까….”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세진은 곰곰이 생각하며 검지로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마개를 문지르다가 곧 그것을 열었다.


 “마리포사. 그게 네 이름이야.”


 어차피 내버려둬도 농락당할 목숨이다. 그렇다면 이 가엾은 악마에게 잠시 동안의 꿈을 꾸게 해주자. 유리병 안에서 뭔가 파삭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열린 입구로 나풀나풀 새파란 나비가 날아올랐다. 세진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던 나비는 다시 나풀나풀 유리병의 입구에 내려앉았다. 가냘픈 나비를 보며 세진은 미소 지었다.


 “우리, 계약을 하자. 마리포사. 그리고 네가 진짜가 되는 거야.”


 나비의 날개가 파드득 떨었다. 놀란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세진이 손을 내밀자 나비는 그 손으로 올라탔다. 조그만 나비를 손끝에 올리고 세진은 속삭였다.


 “내가 널 도와줄게.”


 때때로, 악마를 속이는 것은 인간이라는 걸 모방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높은 천장, 넓은 내부, 정면으로 보이는 무대. 어딜 봐도 노골적으로 강당처럼 보이는 장소는 조용했지만 묘한 술렁임이 있었다. 잠들기 직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을 사람들이 눈을 뜨니 이곳에 있으니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정렬되어 움직이지 않는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왜 내가 여기에 있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립호영고등학교 누리관 2층의 강당. 아마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을 터였다. 물론 모르는 사람도 있기야 할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것이다. 세진은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기대 앉아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무대 위에 나무로 만든 연설대가 보였다. 준비는 끝. 대본은 필요 없었다.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대로 올랐다. 한 걸음 내딛을 적마다 무대 아래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다.


 “안녕하세요. 후배, 친구, 선배 혹은 선생님 그리고 손님 여러분.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학생회장 후보 연설할 때도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연설대 앞에서 언젠가의 일을 떠올리며 세진은 빙긋 미소 지었다. 다정하게, 부드럽게, 상냥하게.


 “호영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3학년 한세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막이 올랐다.



다섯



 눈앞의 스크린 위로 지나가는 영상들을 지켜보며 세진은 눈을 감았다 떴다. 보여진 것들은 지금까지의 이야기였다. 주마등이라고도 하던가. 이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스크린은 위로 올라가더니 그 끝에서 돌돌 말려 곧 뿅하고 사라졌다.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천장과 바닥과 벽이 분간가지 않는 새하얀 공간에 세진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몸을 내려다보면 환자복 차림이었다. 세진은 뒤늦게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이 병원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무대의 정리를 끝낸 후에 밖으로 나왔을 때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2주간 실종상태였으니 당연했다. 그것도 세진 자신 외에도 열다섯 명의 사람들이 실종되었다가 한꺼번에 돌아왔으니 더 그랬다. 덕분에 돌아오자마자 질문에 시달리긴 했으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세진은 본래 사라졌던 그날, 무대가 시작한 날의 이튿날에 입원을 하기로 결정되어있었는데 실종되었던 터라 돌아오자마자 병원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병약한 열아홉 소년이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여기에 극성맞게 질문을 퍼부어댈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세진의 부모 역시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았으니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아직 수술 중인가? 아니면 수술은 다 끝났나? 자신이 원한다면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진은 높이를 알 수 없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바깥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세진은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따로 목표가 있지는 않았으나 그냥 가만히 서있을 수가 없어 걷기로 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닥을 디디며 한참을 걸었지만 역시 벽도 끝도 나오지 않았다. 세진은 계속 걸었다.


 보통 이쯤 되면 마리의 환상 같은 거라도 나와 주는 게 클리셰 아닌가? 농담처럼 중얼거렸지만 사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마리포사는 이미 없는 존재였다. 하물며 미련 역시 가지지 않았으니 세진의 안에 그녀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세진이 이름 없던 모방의 악마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때부터 모방의 악마를 무너트리는 끝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없는 모방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모방이 이름을 가졌으니 거기서부터 모순이 생길 수 밖에 없었고, 그 시점부터 모방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진은 마리포사에게 진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노라 말했지만 결국엔 거짓말이었다. 어차피 이룰 수 없었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모방이었기에 그건 불가능했다. 혹 마리포사가 처음 세진이 말했던 대로 다른 배우들을 잡아먹고 정말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면 되는 순간에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모방은 모방일 뿐이고, 본질을 벗어난 악마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진은 마리포사와 계약을 할 때도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그건 세진이 정말 부, 명성, 자신의 목숨 혹은 그 무엇에도 미련이 없고 바라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불공정한 계약에 의한 계약 파기는 처음부터 무대의 끝을 위해 깔아둔 포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맞이한 끝은 세진이 원하던 형태였다. 최선의 해피엔딩이자 헛된 꿈의 말로.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마리포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사라졌고, 세진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포사 외에는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모두가 무사히 무대를 내려갔다.


 …아니. 다치지 않은 건 아닌가? 상처를 들쑤셔 괴로워하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없었으나 내면에 간직한 상처들은 있을 것이다. 세진은 그것들을 건드렸을 때 그들이 내보일 반응이 궁금했다. 그래서 이 무대를 기꺼이 기획하기로 한 것도 있었다. 그들의 질타나 원망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세진도 무대와 함께 사라진다면 그걸로 더 좋은 결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목숨이었다. 


 세진은 본래 태어나면 안될 아이였다. 하지만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던 아이가 태어났고, 부모는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아이가 하나 생긴다면 더 완벽하게 화목한 가정을 연기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자신의 아이를 죽여 없앴다. 아니, 제대로 인간의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지워버렸으니 죽였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냥 없애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실수가 있었고, 없애버리기에는 너무 늦은 때가 있었다. 이미 인간의 형태가 되어버렸고,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조금만 더 일찍 아이를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비극이었다. 물론 늦었다고 해도 그녀는 계속 아이를 없애기 위해 시도했다. 임신 중에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럼에도 예정된 비극은 그녀를 피해가지 않았다. 아이는 그녀의 뱃속에 끈질기게 붙어 기어코 태어났다. 4월 29일, 봄의 끝에서.


 세진은 지금껏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그러니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진은 병약했고, 수도 없이 고의적인 사고의 위협도 당했다. 분풀이인지 버릇인지 혹은 그 사이 애매한 경계의 무엇인지에 의해. 그리고 이번에는 병까지 있었다. 췌장암 3기라 하면 살아남으면 놀라운 일이었고, 본래도 수술이 불가능한 때였다. 이 역시 운이 좋아 수술이 가능한 케이스였을 뿐이다. 만일 수술 중에, 혹은 수술 후에 죽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세진은 지금 이 새하얀 공간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안, 무의식의 세계일거라고 어림잡아 짐작할 따름이었다.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으니 연옥은 아닐 테고. 아니, 죽었다고 해도 연옥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 아마 지옥에 가겠지 여기고 있었다. 사후의 판결은 나이가 적던 많던 상관없었다. 나이에 따라 판결이 다른 건 살아있을 때뿐이다. 물론 사후세계가 있다면의 전제하지만.


 세진은 살아도 죽어도 상관없었다. 없다고 여겼다. 바라는 게 없는 만큼 간절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살기를 바란 사람들이 있었다. 원하지도 않은 악마의 무대로 끌어올린 장본인이 세진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진에게 살라고, 도망가지 말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긴 해.”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소리 내어 말했다. 텅 빈 장소에 멈춰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행복해지라고 했고, 도망치지 말라고 했다. 나가서 다시 만나면 할 말이 많다고도 했다. 자살할거라면 차라리 자기가 죽여주겠다는 말도 들었지. 형태는 달라도 결국 저더러 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세진의 예상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무대에서 유일하게 예상 밖이었던 건 그 사람들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세진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이내 제 발치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보였다. 발가락을 두어 번 꼼지락대다가 곧 픽 웃었다.


 하긴. 여기서 죽어버리면 운이 좋아 살아남은 거라고 해도 19년 동안 살아온 세월이 아깝긴 했다. 더구나 그 부모 좋은 일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돌아가자. 세진은 눈을 깜박이고 바닥을 봤다. 여전히 새하얗고 밑도 끝도 없어보였다. 문도 뭣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가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세진은 선 채로 바닥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몸을 뒤로 눕혔다.


 풍덩.



*



 수술은 성공적이라고 주치의가 말했다. 약물치료 역시 순조로워 완치는 문제없다고 했다. 암 3기에, 본래도 병약했던 세진이 살 수 있는 확률이 많지 않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빠르자 의사는 감탄을 마지않았다. 운이 좋아서 그래요. 세진은 솔직히 말했다. 운. 이건 운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세진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이 췌장암의 권위자라고는 하나 그 역시 완치 여부는 불분명하다고 했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술이 끝난 후 이틀간 의식불명이었던 세진이 깨어난 지 며칠이 지났다. 늘 그렇듯 세진은 특실에 홀로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간병인이 있기야 했지만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은 세진이 불편하다며 잠시 혼자 있게 해달라고 한 터였다. 어차피 문제가 있으면 간호사를 부르면 그만이었다. 문병을 오는 사람도 몇 있었다. 선생님, 학교 친구들, 친척들. 수술 잘 돼서 정말 다행이다. 빨리 털고 일어나야지. 와서 하는 소리들은 거의 똑같았다. 그저 얼굴만 내밀고 가는 수준이었지만 세진은 그게 더 편했다. 딱 그 정도의 관계. 세진이 지금껏 쌓아오고 만들어온 대로였으니 만족스러웠다. 세진의 부모는 세진이 깨어난 날 얼굴을 비췄다. 다행이구나. 딱딱한 아버지의 말은 ‘수술 한 보람이 있어서’라는 말이 생략되어있었다. 어머니는 역시나 별 말이 없었다. 빨리 병실에서 나가고 싶은 듯하던 그녀는 나가기 전에서야 겨우 말을 건넸다. 다 나을 때까지는 퇴원하지 마렴.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세진은 네, 그럴게요. 한마디만 하고 말았다. 건조한 대면이었지만 예상한 대로였고,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병실에 누워서도 세진은 틈틈이 책을 읽고 공부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부터는 학교에 다시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바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되도록 나가고 싶었다. 더불어 본래 하기로 했던 독립도 시일이 당겨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면 독립하기로 했으나 건강을 회복하면 곧바로 하기로 했다. 그게 아버지의 뜻인지 어머니의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진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본가에 있어도 부모의 관여는 거의 받지 않았으니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나가서도 경제적 지원이 끊어지지도 않을 테고, 가사도우미도 보내줄 것이 뻔했다. 그걸 위해 지금껏 세진이 ‘훌륭한 아들’을 연기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당연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심술은 앞으로 당할 일 없겠구나. 세진은 가만히 생각하며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일은 좋았지만 아직 체력이 다 회복된 건 아닌지라 오래 읽으면 힘에 겨웠다. 읽다가 내려놓고, 읽다가 내려놓고를 반복하고 있으니 조금 답답했다. 산책도 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체력문제로 어려운 일이었다. 멋대로 했다간 간호사며 주치의에게 돌아가며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으므로 세진은 얌전히 누워있기로 했다. 약간 지루하긴 했지만 평온한 일상이 계속 됐다. 2주간의 무대가 무색할 정도로 평온한 파스텔톤 일상이었다.


 거짓의 악마가 속삭였을 때, 남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했었다. 조금 더 인간다워질 수 있을 거라고. 악마의 무대로 인한 순기능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은 얻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 무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지만 태어날 적에 두고나온 것들의 조각을 엉뚱한 곳에서 주워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진은 여전히 완벽하게 인간답지는 않았다. 여전히 평범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짜증을 내거나 싫어하거나,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게 되었다. 세진은 아직도 모자랐다. 그러나 조금 나아졌다. 아직도 비어있었고, 가장하여 내보일 수는 있었지만 괜찮아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들 병문안 와주려나? 가물가물 나른함이 몰려와 졸린 와중에 생각했다. 와주지 않는다면, 퇴원하고 직접 찾아가야지. 놀랄까? 싫어할까? 작게 웃으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이 다음은 낮잠을 조금 더 자고 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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