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의 생활은 지루했다. 날 때부터 병약했던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놀이터보다는 집, 집보다는 병원이 더 익숙했다. 소독약 냄새가 몸에 밸 정도로 가까웠다. 그나마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는 길게 입원하는 일이 없었다는 게 위안이 될 정도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금의 세진의 입원생활은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잔병치레가 많았고, 목숨이 넘나든 적이 수도 없었으나 개중에는 이번처럼 큰 병은 없었다. 하지만 세진은 별 감흥이 없었다. 암, 그것도 췌장암은 듣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큰 병이었고 진단이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죽는다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진은 살아있었다.
악마의 무대를 빠져나오고서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병원생활이 지루한 것과는 별개로 벌써 날짜는 8월 중순을 지나고 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병원의 에어컨 덕에 세진은 끔찍한 여름의 무더위를 만끽하진 못했지만 때때로 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피부가 따끔거린다고 생각하긴 했다. 다들 개학했겠지. 날짜감각도 없이 지내는 무미건조한 일상이지만 달력은 꼬박꼬박 확인하고 있었다. 수술 결과도 좋고 회복도 빠르다고는 하지만 그건 다른 환자들과 비교해서의 이야기였다. 본래도 병약했던 몸이 단시간에 좋아질 리가 만무했으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개학 전에 퇴원하는 일은 어림도 없었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상황을 봐서’라는 말이었다. 이렇다 저렇다 잘라 말하기 어렵긴 할 터였다. 세진은 마음을 편히 가지기로 했다. 어차피 급할 건 없었고, 혹 퇴원이 늦더라도 수능 전에만 돌아갈 수 있으면 되리라고 여겼다. 의사에게 물어봤을 땐 그 역시 장담할 수 없다고 하긴 했지만.
종종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계속 책을 읽었다. 혹은 공부를 하거나 잠을 잤다. 어차피 약기운 탓에 하루의 절반은 자는데 사용했다. 나머지 절반동안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종종 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다람쥐 쳇바퀴 구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는 시간 중에도 멍하니 생각을 하는 때가 있었다. 책을 내려놓고 베개에 기대 가만히 떠올렸다. 그건 대개 지난 악마의 무대, 악몽 속의 일들이었다.
열아홉 해. 세진이 살아온 시간은 길다고 하면 길었지만 짧다고 하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다. 성인이 채 되지 못한 소년의 인생에 있어 그 2주간의 시간은 단연 선명했다.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보고 싶은 걸 봤고, 당초의 목적도 이뤘다. 만족스러워야 했다. 그런데 묘하게 석연치 않았다. 목구멍 안쪽에 뭔가가 걸린 듯이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진은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명제가 불분명한 문제를 앞에 둔 것처럼 골몰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알 것도 같은데 그 조금이 얼마큼인지 가늠할 수 없다. 가물가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자면 엉뚱하게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언젠가의 과거였다. 아직 세진이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었다. 겨우 열여섯, 지금보다도 어리던 그때까지 세진은 놀라울 만큼 분별력이 모자랐다. 모든 일에 그런 것은 아니었고, 사람과 사람의 거리에 대해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진이 달라진 점은 크게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진은 모두를 받아주는 척 하면서도 사실은 정도 이상의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거 하나만은 분명히 달랐다. 열여섯, 그때에 있었던 어떤 일이 아니었다면 세진은 아직까지도 분별력이 모자랐을지도 모른다.
세진은 날 때부터 모든 걸 사랑했다. 그러나 그건 연정의 성질은 아니었고, 조금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이었다. 연정이란 건 가져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세진이 두려움, 분노, 증오를 느끼지 못하듯 연정 역시 그랬다. 그게 잘못되었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일,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사건.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고 커다란 것 같지만 세진은 그걸 크게 여기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실수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세진은 열여섯, 그때에도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 열아홉이 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성장이 더딘 건지, 아니면 그러한 성장통을 느낄 일이 없어 세진의 인생에 있어 제거된 건지는 모르나 그랬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달랐다. 세진과 달리 두려움이나 분노, 증오 그리고 연정까지도 모두 다 느끼고 가질 수 있는 아이들에게는 어김없이 사춘기가 찾아왔다. 열여섯 당시 세진의 곁을 맴돌았던 그 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애는 세진을 꽤나 좋아했다. 아니 좋아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생각해보자면 그 애가 세진에게 가졌던 감정은 처음에는 우정이었고, 그 후에는 연정이 되었을 것이다. 정작 세진은 정 이상의 감정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진은 그때를 회상하면 명백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했다.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막지 않아 손을 잡았고, 막지 않아 끌어안았으며, 막지 않아 입을 맞추고, 막지 않아 몸을 겹쳤다. 삽입 없는 유사섹스였다지만 벗은 몸을 만지고 쓰다듬고 물고 핥는 행위는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세진에게는 없었으나 적어도 그 애에게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나열하면 끝도 없이 길어질 이야기의 결말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 애는 죽었다. 보답 받지 못할 연정을 품고, 이해받지 못할 상처를 받아 맞이한 말로였다. 세진은 그 결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음을 보답 받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달리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 애는 세진에게 지나칠 정도로 의존하고 있었다. 애정결핍도 있었고 늘 흔한 이야기 속의 영원한 사랑에 심취해 있었다. 다소 불안정하던 사춘기의 여린 마음도 한몫했겠지. 그런 것들이 한데 모여 그 애를 몰아갔으리라고 여겼다. 사랑이 비수가 되어 누군가를 파멸 혹은 죽음으로 이끄는 이야기는 흔했다. 그 애는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젊은 베르테르처럼. 그렇다면 세진은 어떤가. 무정한 조연인가. 아니면 상냥한 척 하는 매정한 악역인가.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애초에 세진은 그 이야기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었음으로. 그 애와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까.
세진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병실 밖 복도 끝에 있었다. 복도 끝의 벽은 전체가 유리창이었고, 너머로 바깥이 훤히 보였다. 약간 경사진 언덕 위에 위치한 병원 위치 덕에 이곳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경치가 훤했다. 대낮처럼 밝은 복도와 달리 바깥은 해가 져 캄캄했다. 그 와중에도 가로등이며 네온사인, 자동차 헤드라이트 등의 각종 불빛들로 어지러웠다.
바깥에 나온 이후로 악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포사는 사라졌으니 당연했으나 율리시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볼일이 끝났으니 흥미가 없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돌아가면 됐다. 악마의 무대는 악몽. 악몽은 그저 꿈. 그렇게 여기며 돌아가면 됐다. 방법은 간단했다. 그때의 일을 의식 저편으로 밀어두고 덮어버린 채 ‘아, 그런 꿈을 꿨어’ 하며 치부해버리면 됐다. 그러면 현실은 꿈이 되고, 꿈은 점차 흐려지고 미화되어 아름다웠던 추억정도로 남아 잊힐 터였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걸 알았다. 그러나 세진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꿈을. 악몽을. 악마의 무대를. 지난 현실을.
잊을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일들은 바로 어제 혹은 몇시간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들의 표정, 반응, 행동 그것들이 겹쳐져 연이어 일어나는 연쇄. 병실은 지루했고, 지루한 만큼 생각이 많아졌으며, 그로 인해 자연히 기억을 더듬는 일이 잦아서인지도 모른다. 과정이야 어쨌든 세진이 잊지 못하고 계속 그것들을 더듬는 건 사실이었다. 돌아가고 싶은가? 그때로? 다시 그 무대를 보고 싶은가?
“아니. 그냥 수단이야.”
세진은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무대는 수단에 불과하다. 모방의 악마 마리포사에게 계약을 제안했을 때부터 무대를 내려올 때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무대는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 그 모든 일의 무대. 잊지 못하는 까닭은 그 위에서 있었던 일들 탓이다. 세진은 휠체어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 저 아래의 조그만 가로등을 응시했다. 흰색과 노란색 사이쯤 되는 불빛이 번진 점처럼 보였다.
세진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답을 알고 싶지 않아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처음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세진은 더듬거렸다. 뭐든지 배우는 게 빨랐던 소년에게 있어 이건 난제였다. 다시 목 안쪽이 따끔따끔했다. 손을 들어 목 위를 긁었지만 소용없었다. 겉을 긁는다고 안쪽이 시원해지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목구멍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헛구역질을 해가며 긁어내리면 그건 시원해질까? 그것도 아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길을 잃은 것처럼 헤매지 말고 그 가운데 뻔히 나 있는 길을 찾아야지. 그러나 그 길에 이르기엔 안개는 짙었고,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전전긍긍했다. 익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수단으로서의 무대는 끝이 났다. 문제가 던져졌으니 해답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기다릴 수밖에 없나. 어차피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였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홀로 골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진의 지식으론 턱도 없었다. 아마도 다른 게 필요할 터다. 이를테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세진은 목을 긁던 손을 내렸다. 긁어내린 자리가 화끈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공연히 입술을 한번 핥았다. 뭔가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목을 긁던 손을 들어 제 입술을 만졌다. 그뿐이었다. 세진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에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훑었다. 하나. 딱 하나만 알면 답이 나올 텐데. 알 수 없는 X값을 구하지 못해 도출할 수가 없다. 그 열쇠가 뭔지는 알았다. 그러니 기다려야 했다. 답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
세진의 어머니, 유희경이 적극적으로 힘을 쓴 탓일까. 세진은 아직 퇴원도 하지 않았건만 따로 살 집이 마련되었다. 집, 이제는 본가라고 불러야할 그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식 아파트였다. 소식을 전해준 것은 세진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아버지의 비서였다. 그는 세진이 좋아하는 달고 부드러운 복숭아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아버지인 한은석이 가장 신뢰하는 그는 성격도 좋아서 세진에게 친근하게 대하며 잘해주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꽤 넓고 쾌적한 곳이며 가사도우미나 운전기사 같은 사람들 역시 붙여준단다. 그 외적인 경제적인 지원은 아낌없을 예정이며 병원 역시 걱정 않고 다니면 된다는 말을 들으며 세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짐 역시 다 옮겨졌다고 했다. 빠르기도 해라. 세진은 속으로 감탄했지만 그걸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사소한 잡담이었다. 날씨이야기부터 드라마 같은 이야기까지.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그러면 바로 준비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병실을 떠났다. 곁에 앉아 깎아준 복숭아를 다 먹고 비운 접시도 깨끗이 씻어 정리했다. 침대 곁에 놓인 협탁 위에 아직 잔뜩 남은 복숭아가 들어있는 바구니가 없다면 누군가 다녀갔다는 흔적도 없었다.
세진은 발갛게 익은 복숭아를 보다가 곧 베개 옆에 놓아둔 책을 들었다. 지난밤에 읽다 만 책은 짧은 소설이었다. 마음을 잃어버린 괴물이 사막을 여행하고, 여행길에서 잃어버린 마음을 하나 둘 되찾아 사람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거 내 동생이 좋아하는 책인데 읽어볼래? 아까 왔다간 비서가 지난번에 가져다 준 이 책은 벌써 두 번째 읽고 있었다. 특별히 유쾌하거나 희망찬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쩌면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였다. 책 속의 괴물은 어디까지나 괴물이었으므로 그 겉모습이 아주 흉측했다. 그래서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으나, 처음으로 다가와 손을 내민 선량한 남자가 있었다. 괴물은 그 남자를 잡아먹고, 그 남자의 가죽을 벗겨 뒤집어썼다. 남자의 모습을 한 괴물은 겉모습은 괴물이었지만 그 내면은 여전히 괴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괴물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괴물은 사람들을 잡아먹었고, 그러던 중 어떤 마녀가 나타나 괴물을 꾸짖고 저주를 내렸다. 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괴물이구나. 그렇다면 네가 사람의 마음을 가질 때까지 너는 사람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괴물은 사람을 먹지 못해 굶주렸다. 참지 못해 사람을 먹으려 했지만 끔찍한 구역질만 쏟아졌다. 결국 괴물은 마녀에게 빌었다. 모두 잘못했으니 다시 사람을 먹게 해주세요. 마녀는 냉담하게 말했다. 네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될 때까지는 안 돼. 괴물은 호소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는 방법을 몰라요.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가질 수 있죠? 괴물의 호소에 마녀는 북쪽의 사막을 가리켰다. 사막을 넘어 참회의 호수로 가거라. 참회의 호수는 네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타날 것이고, 네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호수는 영영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막에서 너는 굶주림을 느껴도 죽지는 않을 것이며, 사막은 너를 시험할 것이다. 그래도 가겠느냐? 괴물은 그러겠다고 하고 사막으로 떠났다. 북쪽의 시험하는 백색사막은 끝도 없었다. 괴물은 계속해서 모래폭풍을 만났고, 그때마다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쓰러지면 사막은 늪처럼 변해 괴물을 집어삼키려 했다. 괴물에게 있어 사막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괴물은 사막 가운데서 어떤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을 보고 흠칫 놀랐지만 함께 가자고 했다. 소녀와 괴물은 함께 사막을 걸었다. 오래오래 둘은 대화를 나누고, 모래폭풍을 피하며 발이 푹푹 꺼지는 사막을 걸었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세진은 침대 위 조명기기 곁에 달라붙은 인터폰이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보통은 세진이 간호사들에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이상이 있을 때 이야기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간호사가? 아니면 의사인가? 세진은 의아하게 수화기를 들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간호사의 말은 간단했다. 누군가 저를 찾아왔단다. 찾아온 건 아는 사람이었다. 세진은 잠깐 생각하다가 곧 보이지도 않는데 빙긋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네요. 안내 부탁드려요.”
인터폰을 끊고, 세진은 아직 반절가량 남은 책을 가만히 보다가 미련 없이 덮었다. 어차피 한번 읽은 내용이었다.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으면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왔어?”
윤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곧장 다가왔다. 다가오는 윤성을 보는데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세진은 멀뚱히 윤성의 머리를 보다가, 그가 다가와 침대 곁에 서자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머리색 바꿨네? 잘 어울려.”
“형식적인 칭찬 고맙다.”
“진짜로 어울려서 그래. 앉아.”
윤성의 머리는 그 모양은 그대로였지만 색은 달라졌다. 밝은 갈색에서 검은색으로. 단지 그 차이일 뿐인데 달라보였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걸까? 어림짐작하며 침대 곁의 의자로 자리를 권하는데 윤성은 고개를 내저었다.
“금방 갈 거야.”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서. 하지만 예상한 범주 내였다. 윤성이 찾아와서 살갑게 하하 호호 말을 건넨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방금 왔잖아? 섭섭하네. 우리 할 이야기도 많을 텐데.”
“…네가 궁금한 거겠지.”
자신의 말에 한숨을 쉬는 윤성을 보며 세진은 웃음이라도 터트릴 뻔했지만 참았다. 강윤성. 강윤학이라는 이름을 쓰던 이 후배는 세진의 정체를 알고도 피하지 않았다. 물론 그 무대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특별히 세진을 피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화를 내거나 이해할 수 없다며 말하거나 꺼림칙해했다. 개중에도 세진의 정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사람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럼 강윤성은 어떤가. 화를 냈고, 세진을 죽였다. 기가 막혀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꽤나 오랜 대화도 나눴다.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랬다. 물론 세진이 그를 붙잡은 것도 사실이었다. 세진으로서는 윤성에게 관심이 갔다.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던가? 그랬다. 묘하게 시선이 갔었다. 첫 만남이 인상적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강렬하게 남았으므로.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야?”
“…아니. 말은 하고 갈 거니까 재촉하지 마.”
정말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일까 싶어 묻자 윤성은 대답했다. 그간의 일들은 조용히 읊었다. 딱히 길지 않은 이야기였고, 세진은 말을 끊거나 끼어들지 않고 그 이야기를 전부 들었다. 악마의 무대에서 현실로 돌아온 이야기. 강윤성의 이름으로 누워있는 강윤학이 깨어난 이야기. 곧 있으면 집을 나오게 된다는 이야기. 길지는 않아도 놀랄 법하긴 했다. 동시에 잘된 일이었다.
“이제 너를 찾은 거네? 잘됐다. 축하해, 윤성아.”
빙긋 웃으며 건네는 말은 진심이었다. 세진은 자신이 악마의 계약자였고, 그로 인해 뭘 알고 뭘 꾸몄는지 숨기던 것 외에는 거짓말이 한 적 없었다. 윤성이 윤학의 이름으로 지낸다는 걸 악마를 통해 알았을 때로부터 윤성의 이름으로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게 됐을 때,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시 지금까지. 모든 순간에 세진은 윤성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길 바랐다.
“어. ……말 안 해도 알게 되겠지만, 말하는 게 내가 편할 것 같아서.”
“그럼 더 이상 도망갈 이유도 없게 되네.”
“네 입장에선 그렇겠지. 그리고 도망 아니라고 했다.”
머리를 긁적이다 대답하는 것에 세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주 검지 않고 약간 옅은 색의 눈동자가 윤성을 응시하다가 곧 휘어 웃었다.
“여전히 도망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거야?”
나는 네가 도망가지 않았으면 해. 그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았지만 늘 세진의 말 아래에는 그런 뜻이 깔려있었다. 윤성은 알고 있을 여겼다. 손을 잡으면 잡혀주나 싶다가도 놓으려 하고, 곁에 있을라치면 있는가 싶다가도 일어났다. 자꾸만 빠져나가려하면서 윤성은 도망이 아니라고 말했다. 윤성이 불쑥 대답했다.
“그게 너랑 상관있으면 좋겠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단 소리잖아?”
“네가 나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처럼?”
“그래, 윤성아. 이제야 이해해주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억지로 이해하려 하진 않아.”
억지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기만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하지만 세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걸 입 밖에 내면 윤성이 또 부정할까 궁금했다. 그러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런 사소한 즐거움은 일단 제쳐놓아야 할 때였으므로. 세진이 입을 열려는데 윤성이 한 박자 빨랐다.
“하나만 묻자.”
곁에 앉지도 않고 선 윤성이 세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망가면 쫓아온다 했었고 내가 사라지는 건 싫다고 했잖아.”
그게 친구 이상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냐? 그렇게 묻는 말은 예상외였다. 친구 이상? 세진이 말하려는 찰나 윤성이 손바닥으로 눌러 막았다. 닥치고 있어봐. 다소 거친 언사에 세진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윤성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나도 네 좆같은 인성을 보고 짜증나긴 했는데 또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거든?”
어라? 윤성의 말에 세진은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묘하게 목구멍 안쪽이 걸린 듯 따끔거렸다. 익숙한 기분이었다. 풀리지 않는, 대응하는 값을 알 수가 없어서 답을 도출해낼 수가 없는 문제를 생각하면 으레 느끼던 그것. 그렇지만 세진은 잠자코 윤성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런데 넌 변하지 않겠지.”
끝에서 끝까지 가도…바뀌지 않을 게 분명하더라. 윤성은 차분히 말했다. 단언하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세진은 날 때부터 틀에 박힌 것처럼 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상냥한, 사려 깊은 소년. 그게 세진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세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악마의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래서 정리하고 가려고.”
윤성은 손을 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진은 입을 다문 채 덤덤히 잇는 말을 들었다.
“나중에 만나면 안부 인사나 하며 헤어지자.”
마치 끝을 고하는 것 같았다. 정리하고 가려고. 그 말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세진은 문득 윤성이 오기 전까지 읽던 책을 떠올렸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려고 사막을 헤매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아니, 답답한가? 기분이 이상했다. 약간 울렁거리는 것도 같았고, 가슴 속에서 뭔가 긁는 것도 같았다. 세진은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 위해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한 기분은 처음이었으므로. 그와 동시에 책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괴물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참회의 오아시스 앞에서 죽고 만다. 소녀를 위해서. 괴물이 죽은 까닭은 사막을 헤매며 가지게 된 사람의 마음 탓이었다. 그 마음이 괴물을 죽였다. 괴물이 그 마음을 몰랐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나, 괴물은 그 마음을 죽기 직전에 깨닫고 만다.
“윤성아. 벌써 잊어버렸어? 도망가면 쫓아간다고 했잖아.”
세진은 여전히 그린 듯 빙긋 웃는 표정으로 윤성을 봤다.
“질리지도 않냐? 그리고 도망 아니라고.”
“거짓말.”
윤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세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저를 내려다보는 윤성을 응시했다. 여전히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계속, 계속 따끔거렸다. 탄산음료를 숨도 쉬지 않고 꿀꺽꿀꺽 억지로 삼킨 것처럼,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새파란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처럼 따끔거렸다. 세진은 이 따끔거림이 내내 풀리지 않았던 난제의 X값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지금이 그걸 풀 수 있는 때라는 것도.
“날 떠나려고 도망치는 거잖아. 내가 쫓아가지 못하게 정리하려는 거지.”
“…….”
“하지만 난 정리해줄 생각 없어, 강윤성.”
“한세진.”
윤성이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세진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아까 멋대로 내 입을 막았으니까 이젠 내 마음대로 얘기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냐?”
“…….”
윤성은 입을 다물었다. 세진은 윤성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모든 사람을 좋아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말했듯이 넓은 의미의 사랑.”
아가페냐고 묻는 말에 필리아라고 말했었다. 세진은 모두를 좋아했다. 사랑의 범주는 아주 넓어서 이것만이 사랑이다 하고 딱 잘라 정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종류도 다양했다. 아가페,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 프래그마, 필리아 등등. 세진은 대개의 모두를 좋아했고, 사랑했다. 그 무게는 모두 같았다. 심지어 세진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혐오하다시피 하는 부모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같은 무게의 사랑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개개인에게는 없었다. 그건 우애나 연민, 혹은 연정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세진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러나 그게 끝일까? 세진은 자꾸만 목이 따끔거려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너에게는 다르다면, 그래도 도망칠 거야?”
사람의 마음이 없는 괴물은 마지막 순간에 소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깨달았다. 난생처음 만난 소녀를 사랑하게 된 괴물은 처음부터 자신을 죽이기 위해 동행했던 소녀에게 목숨을 내어줬다. 무엇보다도 특별한 소녀를 위해, 자신이 먹어치운 소녀의 오빠에게 속죄하기 위해.
“이건 내가 하던 사랑과 달라.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알잖아. 도망쳐도 소용없는 거.”
세진은 이야기 속 괴물과 자신이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본질적으로는 같겠지만 괴물의 상황과 세진의 상황은 판이하게 달랐다. 끝도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괴물이 가지게 된 인간의 마음이 세진의 목 안쪽에서 따끔거리는 것과 같다는 건 알았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애가 죽은 후로 세진은 그 누구에게도 키스하지 않았다. 피부가 닿는 건 기뻤고, 즐거웠지만 키스 이상의 것은 허락한 적 없었다. 그저 손을 잡고, 포옹하고, 때때로 이마나 손등에 입 맞췄지만 그 뿐이었다. 지나치게 깊은 관계는 원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를 죽이게 될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아쉬워서, 그렇게 죽어버린다면 안타까워서 그런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윤성에게는 입 맞췄는가. 키스했는가. 멀어지려는 그를 붙잡았는가. 왜 작별인사를 건네려는 그 말에 초조하고 불안해졌는가.
세진은 늘 지어보이는 가면 같은 웃음도 버리고 윤성을 보다가 손을 뻗어 그 팔을 붙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별이 될 것처럼 열이 오르는데, 너는 도망칠 거야?”
이게 사랑인가? 세진은 알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만은 확실했다. 사람의 마음을 알아버린 괴물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세진은 윤성을 붙든 채 단호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가지 마.”
눈앞의 이 소년을, 이 남자를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코.
이것은.. 놀랍게도... 답록이 맞고요(비참
수락도.. 맞거든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윤..성아...ㅠ..ㅠ.ㅠ..말도 안돼..ㅠ.ㅠ...윤성이가... 세진이를.. 조아해...??????¿¿¿¿¿¿¿¿¿¿¿¿¿
엉엉... 흐에엥.. 어엉ㅇ..... 조아해.. 윤성아... 조아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흑흑 탐라에서 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엉엉.. 윤성아.. 조아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울며 기어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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