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가 끝났다.

 비일상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빨랐다. 차희승은 동업자인 안다미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출근을 했고, 그간 잘 쉬었느냐고 묻는 단골들의 인사를 받았다. 낮과 밤이 뒤집힌 생활로 돌아오니 비로소 조금 잘 수 있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차희승이 내내 잘 잔 건 아니었다. 그의 불면증은 오래되었고, 좀처럼 고치지 못했다. 동창회에서 민서현이 말했던 것처럼 약의 도움을 받아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역시 그 방법은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점이 불쾌하단 게 이유였다. 별난 성격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달라진 바 없다. 한때는 잠이 오지 않아서, 그리고 어린 치기로 밤거리를 나돈 적도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운이 좋았다. 나쁜 길로 엇나가지도 않았고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다.

 운이 좋다는 건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요행이 있어도 운이 좋다고 했고, 뜻하지 않은 좋은 일도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타이밍이 맞아떨어지는 것도 행운일 것이다. 그러니 이봄과의 만남도 따지자면 ‘운이 좋다’에 포함되었다.

 차희승이 이봄을 처음부터 특별하게 여긴 건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후배였다. 좀 귀엽고 눈에 밟히는 후배. 그리고 스물다섯과 스물여섯 사이쯤에 만났을 때, 먼저 아는 척을 할 정도는 되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끊긴 줄 알았던 인연이 다시 이어졌으니까. 이런 생각이 참 감상적인 것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차희승은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이봄이 찾아왔던 그해 제주도에서의 날들은 제법 선명했으니까. 따라서 이번 동창회에서 이봄을 다시 만난 건 그때로부터 이어진 행운이었다.

 “희승 씨, 오늘은 러스티 네일이 좋겠어.”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봐요.”
 “그게 티가 나?”
 “좋은 일 있으시면 꼭 러스티 네일을 주문하시니까요?”

 차희승은 부드럽게 웃었다. 친절한 미소에 김세민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래서 희승 씨를 참 좋아해. 그 말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의 승진에 관한 이야기였다. 김세민은 몇 달 전부터 바 멜로우를 찾은 단골이었는데, 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길 좋아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에 대해 잘 알게 되었는데, 김세민의 가장 큰 관심사는 늘 출세에 있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김세민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고, 좋은 일이 있거나 나쁜 일이 있으면 꼭 멜로우를 방문했다. 그랬던 그가 바라마지 않았던 승진을 했으니 기쁠만도 했다.

 러스티 네일의 조주법은 간단하다. 미리 칠링해둔 올드 패션드 글라스에 얼음을 채우고 스카치 위스키와 드람뷔를 순서대로 따른 뒤 가볍게 저어주면 끝. 간단하지만 복잡한 맛을 품고 있는 칵테일은 달콤했다. 체리목으로 만든 코스터를 깔고 러스티 네일을 내어준 차희승은 술을 정리하고 곧장 사용한 도구를 닦았다. 오늘은 손님이 많지 않아 느긋했다.

 “희승 씨는 좋은 일 없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김세민이 묻자 차희승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늘 똑같죠.”
 “그래도 며칠 전까지 휴가 다녀왔다며. 꽤 길게 다녀온 걸로 아는데 어디로 갔었어? 얘기 좀 해줘.”

 오지랖 넓고 타인의 얘기에 관심이 많은 손님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차희승은 그를 보다가 짧게 웃는 소리를 냈다.

 “동창회 다녀왔어요. 10년만에 만난 얼굴들이라 반가웠죠.”

 프라하는 아름다웠다. 다소 춥다는 인상을 받긴 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도 좋았다. 다음에 한 번 더 와도 좋겠다 싶을 만큼. 사실 어쩌면 다음에 갔을 때는 이번만큼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이 좋았던 이유는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좋았던 거였으니까.

 “동창회? 좋았겠다. 옛날 친구들 만나면 할 얘기도 많잖아.”
 “네. 추억도 많고요.”
 “첫사랑 같은 건 없어? 보통 동창회 하면 첫사랑도 만나고 그러잖아. 나 지난번에 동창회 갔을 때는 학생 때 썸 타던 둘이 다시 눈맞아서 이번에 결혼한다고 하던데. 희승 씨는 그런 거 없어?”
 “그런 일이 어디 흔한가요.”

 정말 흔하지 않다. 될놈될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일이 간혹 있긴 하지만, 차희승으로서는 어림 없는 얘기였다. 학생 때 첫사랑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사건이 있기야 했지만…. 굳이 손님에게 그걸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차희승은 그때의 기억을 온전히 저만 갖고 싶었다.

 차희승이 동창회에 참석하게 된 이유는 사실 쉬고 싶어서였다. 고등학생 때, 3년간 매번 캠프에 참여했던 이유와 비슷했다. 그때는 공부에 짓눌려서, 그리고 아버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고, 이번엔 정말 그냥 쉬고 싶어서였다는 점이 조금 다를 것이다.

 쉬기는 정말 잘 쉬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잘 못 잤다는 걸 빼면 정말 잘 지냈다. 그리고 잘 못 잔 것도 동창회가 끝날쯤에는 괜찮아졌다. 아주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던 날이 있었다.

 차희승은 종종 타인과 밤을 보내곤 했지만 기실 쭉 잠든 적은 없었다. 모르는 이가 옆자리를 데우는 게 싫었다기보다는 겨우 하룻밤으로 엮여서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테디한 파트너를 두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차희승은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을 여기저기에 뿌리고 싶지 않았다. 정이 많다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차희승의 별난 성격은 마음의 벽을 높이 세우고 누구든 쉽게 들여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다정은 벽 안쪽에서, 혹은 벽 바깥에서 각각 흘러나오는 것이었지만 그 성격이 달랐다. 이 일련의 서술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이봄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그다지 소용 없었다는 말이다.

 이봄은 개과였다. 그렇다고 개는 아니고, 여우. 여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살랑살랑하면서 비위를 맞춰주고, 다정하게 웃고, 예쁘고 귀엽게 구는 주제에 눈치마저 빨랐다. 밀어낼 틈도 없이 빗장이 열리고 그 사이로 성큼성큼 들어온 것이 이봄이었다. 단순히 거기서 끝내지 않고 아예 드러누워 예뻐해달라고 하고 있으니 마음이 기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깜찍한 후배와 예정에도 없던 밤을 보낸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차희승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타인이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것에는 별 관심 없었다. 차희승은 자신을 통제하는 데에 신경을 쏟았지, 남을 통제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봄과의 ‘어쩔 수 없었던’ 일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차희승은 그게 이상했다.

 동창회는 길었지만 짧다면 짧았다. 그 시간 동안 특별한 일이 있으리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이봄과 차희승의 관계는 어딘가 달라졌다. 이봄은 차희승의 여우가 되었고, 차희승은 이봄의 왕자님이 되었다. 그건 참 간지러운 얘기였다. 서로를 길들이는 관계라니. 차희승은 이봄이 자신의 어딜보고 그리 좋아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이봄은 귀엽고 예쁘고 얄미웠으니까.

 이봄은 어떻게 흘러가면 좋을지 같이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게 즐거울 거라며. 며칠 전의 차희승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며 넘겨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차희승은 이봄과의 관계를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많은 시간을 들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차희승은 사랑에 어떤 환상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걸 사랑이라고 부르긴 어렵다고 여겼다.

 “차희승! 정리 다 했어?”

 쓰레기를 내놓고 온 안다미가 물었다. 차희승은 바 테이블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서 허리에 맨 앞치마를 풀고, 걷어올린 소매를 내렸다.

 “어. 퇴근하자.”
 “으! 피곤해 죽겠어. 얼른 집 가야지.”
 “피곤하긴 무슨. 오늘 거의 놀아놓고는.”
 “야, 남편 얼굴도 못 보고 바에 서 있는게 얼마나 고역인 줄 알아?”

 최근에 새신부가 된 안다미는 남편을 징그러울 정도로 좋아했다. 연애하는 내내 자신의 연애사를 어찌나 떠들어대던지, 차희승은 절대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물론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쉬라고 보내놓으면 또 기어나올 거면서 말이 많아.”
 “너한테만 바 맡겨놓을 순 없잖아. 이 누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감사히 받도록 하렴.”
 “웃기네.”

 짧은 대화를 몇 나누고, 차희승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먼저 들어가. 문은 내가 잠글테니까.”
 “진짜로?”
 “그럼 내가 가짜로 말하는 줄 아냐.”
 “하긴, 차희승이 일할 때 아니면 빈말은 안 하지.”

 누가 들으면 일할 땐 빈말만 하는 줄 알겠네. 차희승이 짧게 투덜거렸지만 안다미는 퇴근하느라 바빴다. 나 간다! 짧게 외치고 문 밖으로 쏙 튀어나가는 동업자를 보던 차희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바를 한 번 죽 훑어보고 문을 잠그고 나섰다. 새벽공기는 아주 차가워서 몸을 절로 움츠리게 만들 정도로 추웠다. 차희승은 패딩을 언제 꺼낼까 가늠하면서 조용한 거리를 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떠 있었다. 뾰족한 손톱달이 빙그레 웃고 있는 걸 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낸 차희승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역시 사랑은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 정도는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단순한 애정인지 연애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봄이 신경쓰였다. 추운 날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법이 없는 차희승이 기꺼이 손을 빼고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차희승의 마음의 무게는 어느새 슬그머니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역시 어쩔 수 없지. 액정 위에 뜬 시계를 보며 시차를 계산하고,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몇 번,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형, 퇴근했어요? 하는 말에 차희승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어느새 일상이 된 퇴근 후 통화는 차가운 바람 따윈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기꺼웠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러면 너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차희승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봄과 차희승은 서로를 길들이고 있었다. 다만 그것뿐이었다. 아직은.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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