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희승 25세, 재회시점.

날조와 캐붕 미리 죄송합니다.

 

 

 

 피곤해. 쉐이커를 씻어 두고 마른 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한 생각은 벌써 50번쯤 반복한 것 같았다. 근래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요전번에 한 아버지와의 통화 때문인 것 같았다. 혹은 가진지 오래된 불면증 탓도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곧 히트사이클인가? 스트레스 좀 받는다고 잠을 설칠 정도로 예민해 빠진 신경줄이라 이것저것 걸리는게 워낙 많았다. 지뢰밭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차희승이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자지 못할 것 같았고. 게다가 오늘은 본래 휴일이었다. 동료 바텐더의 사정을 봐주느라 그를 대신해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침대 위에 있었을 텐데. 다음에 자신이 차희승을 대신해 휴일을 바꿔주겠다는 말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1년 째, 차희승은 바에 서는 것에 익숙해졌다. 손님을 맞이하며 제 감정을 숨길 수 있게 되었고, 친절한 목소리를 꾸밀 수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자신을 죽이는 일이 몸에 배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몸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서, 밀려드는 피로감을 어찌할 순 없었다. 콘택트 렌즈를 낀 눈은 뻑뻑했고 몸은 무거웠다. 그나마 위안이 된 점은 오늘의 바에 손님이 별로 없다는 점과 퇴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시간 되자마자 퇴근해야지. 차희승은 시간을 가늠하다가 막 바에 들어서는 새로운 손님을 봤다.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온 손님을 본 차희승은 속으로 응? 했다. 손님이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그리고 손님이 바 테이블에 앉았을 때, 차희승은 짧게 입을 벌렸다. …아.

 이봄. 차희승은 깜찍하게 아양 떨던 후배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 캠프에서 짧게 만났던 두 살 어린 후배. 캠프 후에도 드문드문 만난 그 애는 차희승의 울적했던 졸업식 때 마지막으로 봤었다. 걔가 가져왔던 꽃다발이 무슨 꽃이었더라. 몇 년은 된 기억을 뒤져보면 노란 프리지아가 섞여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맞을 것이었다.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이었는데도 꽃다발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언뜻 했었으니까.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졸업 축하한다고 말하던 후배의 얼굴은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로 해맑았었다. 차희승은 그 애를 지금껏 잊고 지냈던 것이 무색하도록 그때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프리지아의 달콤한 향기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날의 햇살의 온도, 저를 부르던 목소리 따위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었다. 이렇게 피곤하고 엉망인 상태에서 재회라니.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미 옛날에 지나간 날인데도.

 차희승은 아주 짧게 이봄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이봄은 비치된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이봄이 고개를 살짝 들었고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순해 빠진 낯으로 이봄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차희승은 잠시 말을 골라야 했다. 늘 걸고 있는 친절한 미소를 띠긴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아무래도 저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학창시절의 차희승은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고 웃는 법이 없었다. 사방에 시큰둥함과 짜증을 뿌리고 다녔으니 친절하게 웃는 얼굴과 매치가 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이봄은 여전했다. 안경과 그 너머의 에메랄드빛 눈, 염색하지 않은 머리칼과 단정한 옷차림. 키가 좀 큰 것 같다는 걸 빼면 고스란히 자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봄은 메뉴판을 보고 고민하는 듯 했고, 차희승이 먼저 입을 뗐다.

 “고민 중이시라면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갔다. 바로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이봄이 정말 저를 못 알아보나 궁금했기도 했고, 조금 놀래켜줄 생각도 있었다. 물론 이봄은 차희승을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봄이 차희승의 후배라는 건 바뀌지 않는 일이었다.

 “네, 추천 부탁드릴게요.”

 처진 눈꼬리가 유순하게 휘어지는 얼굴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역시 이봄 맞네. 차희승은 저도 모르게 조금 더 웃었다. 기억이 맞다면 입맛은 무던한 편이었던 것 같았다. 캠프 때 이후로도 간혹 보다보면 간식을 입에 달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입맛이 여전한지는 알지 못했지만.

 “가리시는 게 없으시다면 손님의 첫 인상으로 토대로 추천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사실 차희승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메뉴얼 상으로도 이런 말을 하라고 명시되어 있지도 않았고. 이봄이 좋다고 하기에 차희승은 즉각 칠링한 글라스를 꺼냈다. 얼음을 넣고 깔루아를 아래에 깔고, 그 위로는 우유로 쌓는다. 가니쉬로는 파삭하게 부서지는 큼직한 초콜릿 볼을 픽에 꽂아 잔 위에 걸듯이 올렸다. 간단하고 도수가 낮은 달콤한 술.

 차희승은 깔루아밀크를 이봄의 앞에 밀어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손님께서는 콩고물이 떨어질 만큼 성공한 후배는 되셨나요?”

 난데없는 말에 이봄이 의아한 낯을 하고 차희승을 본다. 차희승은 친절한 웃음을 슬쩍 내려두고 픽 웃었다.

 “안녕, 봄아.”
 “……희승 선배?”

 이봄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곧 크게 떴다. 그야말로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것은 곧 반가움으로 바뀌어서, 이봄은 함빡 웃음지었다.

 “진짜 선배예요?”
 “그럼 가짜겠어?”
 “그건 아닌데요….”

 이봄은 차희승을 보다가 그가 앞에 밀어준 깔루아밀크로 잠시 시선을 내렸다. 아주 짧은 순간 말이 없었고, 그다음엔 다시 차희승을 봤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셨나 봐요.”

 분명 검사가 되겠다고 한 사람이 호텔 바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으니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내가 얘한테 뭘 내색했던가? 아니, 어쩌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19살의 차희승은 조금 불안했고, 회의적이었으니 눈치 빠른 이봄이 그걸 읽어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희승은 그걸 잠시 가늠해봤다가 이내 관두고서 그래, 하고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
 “다행이에요.”

 여기서 만날 줄 몰랐다고 말하는 이봄은 제법 귀여웠다. 하긴, 그 시절에도 귀여웠던 애였으니 새삼스럽긴 하지.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만나 반가운 건 이봄 뿐만 아니었다. 차희승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콩고물은?”

 차희승이 묻는다. 놀리는 투가 맞았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정말 뭐라도 보여드릴 수 있어요.”

 정말로요. 호언장담하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차희승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바 테이블 저쪽에서 “여기요.” 하고 부르는 소리에 “네.”하고 대답했다. 이봄에게 입 모양으로 ‘놀다가 가.’하고 속삭이고서 자리를 뜬다. 이봄이 들어오고 난 후로 손님이 늘었다. 좀 더 여유로웠다면 오래간만에 만난 후배에게 이것저것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바에는 차희승 말고 다른 바텐더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일하게 두고 혼자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추 손님 응대가 끝나고 나면 퇴근할 시간이었다. 차희승은 한숨 돌리며 이봄이 앉아있었던 자리를 돌아봤다. 이봄은 아직 거기에 있었고 다른 바텐더와 대화 중이었다. 잘 놀고 있군. 속으로 생각한 차희승은 곧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나왔을 때도 이봄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칵테일 잔을 막 내려놓다가 차희승을 발견하고는 곧장 일어났다.

 “선배! 퇴근하세요?”
 “어. 이제 끝났으니까. 아, 술값은 내가 냈어. 넌 그냥 가면 돼.”
 “네?”

 오랜만에 만난 후배한테 술 좀 사줄 수 있지 않냐고 말한 차희승은 조금 하품을 했다. 이봄은 잠시 벙 쪄있다가 곧 정신차렸다.

 “그럼 선배, 이제 뭐 하세요?”
 “그냥 집에 갈 것 같은데, 왜?”
 “그럼 귀여운 후배랑 좀 더 어울려주실 수 없으신가 해서요.”

 둥글게 웃는 얼굴이 꽤 보기 좋았다. 차희승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또 픽 웃었다. 괜히 손을 뻗어서 차분한 봄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리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일단 나가자. 퇴근했는데 직장에 오래 서 있고 싶지 않아.”
 “어디로 가는데요?”
 “글쎄.”

 시간이 좀 늦은지라 어디 가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차희승은 우선 이봄을 데리고 호텔을 나섰다. 밤공기는 살짝 눅눅했다. 섬이란 대체로 그렇지만, 8월의 여름은 좀 그런 면이 있었다. 장마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줄 걸 그랬나? 아까 술을 사줬으면서 괜히 그런 생각을 했다. 이봄이 잘 먹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은 탓이다. 하지만 이내 관뒀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이것저것 사주자니 괜히 애 취급하는 것처럼 느낄지도 몰랐으니까.

 “근데 제주도에는 어쩐 일이냐?”

 대학 다닐 때 아닌가? 어쩌면 방학이라 내려온건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다. 그러면 봄이 씩 웃었다.

 “선배를 만나려고 했는 걸지도요?”
 “이게 수작부리네.”

 이봄은 농담조로 말했고, 차희승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가도 이봄은 지금 시험을 준비하고 있노라고 얘기한다. 이봄의 근황을 들으며 차희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봄은 귀여운 구석이 있었지만, 그의 귀여운 부분과 이봄의 성실한 면은 별개다. 귀엽다고 해서 성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사람은 다면적이기 마련이고, 차희승은 이봄의 한 면만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란 어렵지 않았다. 뭐,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만.

 “내일 또 놀러와도 돼요?”
 “재미없을 텐데. 놀러 올 거면 그냥 출근 전에 와. 낮에 시간 있으니까 구경시켜줄게.”
 “…선배 왜 이렇게 친절해요?”

 이봄은 졸업식 때까지의 차희승만을 알고 있다. 지난 5년간 둥글어진 차희승을 모른단 의미였다. 차희승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싫으냐고 타박하지 않고,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만에 봤으니까 서비스.”
 “와…. 선배가 그런 말 하는거 처음 봐요.”
 “언제는 오래 본 것처럼 말한다?”

 이봄은 금세 이잉하고 아양 떠는 소리를 냈다. 그게 또 귀여워서 머리를 헤집어줄까 했지만 관뒀다. 차희승은 이봄과 몇 마디 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번호.”

 이봄은 그걸 받아들고 제 전화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건다. 두어 번 신호가 가며 제 스마트폰이 울리면 통화 종료. 이봄이 배시시 웃는다.

 “내일 몇시에 만나요?”
 “한…1시쯤 볼까?”

 자고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서면 딱 그때쯤 만나면 되겠다 싶었다. 이봄이 양순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희승은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내일 가보고 싶은 곳 있으면 생각해놔.”
 “선배가 데려가주실거예요?”
 “그럼 데려가줄 생각으로 말하는 거지.”

 결국 차희승은 이봄의 머리를 또 헝클어트렸다. 봄이 아, 하는 소리를 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얘는 왜 달라진 게 없지. 손에 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에 괜히 손을 떼낸 후 잼잼 쥐었다 폈다.

 “숙소는 여기야?”

 두 사람은 호텔 근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멀리 나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고, 이봄이 바에 내려왔다면 아마도 이 호텔에 숙박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이봄은 맞다고 대답했다.

 “내일 데리러 올게. 준비하고 로비에 나와 있어.”
 “선배, 되게 어른 같아요.”
 “내가 너보다 두 살은 더 많다.”

 꼰대 같은 발언을 한 차희승은 금세 손을 대강 흔들고 몸을 돌렸다.

 “내일 보자.”
 “내일 봬요!”

 눈은 여전히 뻑뻑하고 피로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썩 좋지 않았던 기분은 좀 나아져 있었다. 역시 사람을 좀 만나야 하나? 하지만 사람이라면 매일매일 바에서 질리도록 보는데. 지인을 만나는 게 도움이 되는 건가 싶었지만 제주도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니 그런 일은 요원했다. 뭐, 아무렴 어때. 차희승은 대강 생각을 끊어냈다. 내일 제시간에 일어나서 운전해 나오려면 집에 가서 바로 잠들어야 할 것이었다. 오늘은 좀 자고 싶은데. 차희승은 걸음을 재촉했다.

 제주도 푸른 8월의 밤이었다.

 


 

 

캐붕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견디세요(뭘

아닙니다.. 정말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수정하겟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봄이가 너무 귀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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