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날은 아직도 추운데 창 너머에서 들어오는 햇살은 온화했다. 닫힌 문 너머에서는 바람 한 점 소리 없었고, 젖혀놓은 커튼은 얌전히 묶인 채 창문 가장자리에 놓였다. 민이헌은 졸음이 덜 가신 얼굴로 멍하니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빛 속에서 허공에 떠다니며 춤을 추는 먼지를 보다가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축 늘어트렸던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른다. 그리고 하품.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책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민이헌은 떨어진 책을 눈으로 좇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좀 더 잘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관뒀다. 지금 자버리면 밤에 잘 못 자니까. 게다가 이따가 누굴 만날 약속도 있었다.
기지개를 켠 김에 쭉쭉 스트레칭을 하고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읽어야겠어. 몇 번이나 다시 읽고 있는지는 몰라도 다음번에야말로 완독하고 싶었다.
일기장에 이 다짐을 적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민이헌은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면 안쪽에 다닥다닥 쌓여있는 반찬통들이 있었다. 그걸 멍하니 보다가 물병을 꺼낸다. 물잔을 꺼내 물을 채우고, 물병은 도로 넣어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눈에 걸리는게 있었다. 벽면에 걸린 일력. 2월 15일 목요일. 오늘은 민이헌이 일상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저택에서 돌아온 날은 2월 9일이었다. 분명 약 2주간을 거기서 보낸 것 같았는데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탈출했더니 바깥은 겨우 몇 시간이 지나있을 뿐이었다. 저택에 모였던 사람들은 몇 마디를 나누고 헤어졌다. 연락처를 교환하거나, 그냥 몸을 돌리거나. 아니면 돌아가는 길에 동행하거나. 민이헌은 마지막에 해당했다. 탈출한 직후에는 어떻게 집에 온 지 몰랐다. 차 안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긴 했는데 머릿속이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멍했다. 어쩌면 다시 머릿속이 엉망이 되려던 참인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온 직후, 민이헌은 쭉 잤다. 까치설날을 홀랑 잃어버리고 깼을 때는 2월 10일이었다. 본가에 들렀다가 외가도 들렀다. 민이헌은 쉬고 싶었지만 매년 명절마다 당연히 하는 집안 행사에 빠질 수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싶었던 탓이다. 또 할아버지의 역정을 듣고 싶지 않았다. 무서웠던 건 아니다. 아무리 정정하다 한들 할아버지는 노인이었고, 고혈압이 있었으니 그 건강이 염려되었다.
여하간 예년과 같은 명절이었다. 아, 딱 하나 달랐던 게 있었다.
“…….”
민이헌에게는 사촌 형제가 셋 있다. 형이 둘, 동생이 하나. 큰아버지의 아들이 둘, 작은아버지의 아들이 하나. 민이헌은 큰아버지의 아들들과는 썩 데면데면했다. 작은아버지의 아들과는 글쎄, 꽤 친했었던 것 같았다. 그건 확신은 아니었다. 어쩐지 어릴 때 곧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 최근 몇 년 동안은 제대로 된 교류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대화조차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던 중에 이번 설날 마주친 그는 비장하게 말을 걸어왔다. 조만간 만나자고.
그리고 현재. 민이헌은 집 근처 카페에서 사촌 동생과 마주 앉아있었다. 만나서 인사를 하고 10분째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한참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앞에 놓인 바닐라 라떼가 그럭저럭 식었다. 민이헌은 그걸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뗐다.
“이정아, 무슨 일 있어?”
“…….”
사촌 동생, 민이정이 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보고만 있었다. 민이헌의 물음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은 형한테 있지….”
“응?”
민이정의 영문 모를 말에 민이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민이정이 뒤이어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 …작년 추석까지의 형이랑 달라 보여서.”
그 물음에 민이헌은 그제야 민이정이 왜 만나자고 했는지 깨달았다. 민이정은 어릴 적부터 섬세한 면이 있었다. 겁이 많기도 했고. 민이헌의 엉망이 된 기억 속에서 민이정은 간혹 제게 말을 걸었는데, 민이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말을 걸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쩌면 민이정은 민이헌의 이상한 면을 알아차렸던 걸지도 모른다.
“괜찮아.”
민이헌은 바닐라 라떼가 든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민이정이 조심스레 묻는다.
“진짜? 정말로?”
“진짜. 정말로.”
민이정은 민이헌을 물끄러미 보다가 아메리카노를 벌컥 마셨다. 물도 아닌데 꿀꺽 삼켜대는 것이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답답해서인지 알 길이 없었다.
“활동, 오래 쉬었잖아. 그… 형 기억도 그렇고….”
긴장한 쪽이 맞나보다. 민이정은 민이헌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아메리카노 잔만 노려보고 있었다. 민이헌은 그걸 보다가 조금 웃었다.
“응, 괜찮아. 활동 안 한 건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야. 기억은… 얼추 괜찮아졌어.”
“…다행이다.”
바싹 긴장하고 있던 민이정의 어깨가 스르르 내려가는 게 보였다.
“난… 형이 이번에도 날 못 알아볼 줄 알았어.”
아, 이래서 그간 찾지 않았던 건가. 이전에 민이정을 기억 못 한다는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냐, 기억해. 내가 그전에 널 못 알아봤다면 미안해.”
“형이 왜 미안해? 그런 거 아니야. 그런 말 들으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냥, 형이 많이 힘들었으니까. 그 말이 중얼거림처럼 따라온다. 민이정은 민이헌을 염려했다. 어릴 때 친해서 그랬나? 아니면 민이정이 정이 많아서 그렇거나. 민이정은 외동이었기 때문인지 민이헌을 제법 잘 따랐었다.
“올해는 윤영이 누나…한테 갈 거야?”
민이헌은 그제야 누나를 떠올렸다. 아니, 사실은 내내 기억하고 있었으면서도 외면했던 것이다. 민이헌은 누나의 죽음을 받아들였으되 받아들이지 못했다. 누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누나를 보러 가진 않았다. 그러면 정말 뭔가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기억이 혼재한 와중에도 그것만은 두려웠다. 그럼 지금은?
“가야지.”
“그, 형이 괜찮으면… 데려다줄까?”
오늘 이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구나. 민이헌은 민이정을 물끄러미 봤다.
“너도 바쁘지 않아? 연재한다며.”
“한나절은 괜찮아. 그리고 그 정도 외출도 못 할 만큼 마감에 자신 없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언제까지고 삼촌을 운전기사 노릇을 하게 할 순 없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했는데. 민이정의 말에 민이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아냐.”
민이정이 쑥스러워했다. 민이헌은 가만히 웃으면서 그를 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 반.
“저녁 먹고 갈래?”
“그래도 돼?”
“물론.”
“그럼 먹고 갈래.”
그 말을 반가워하는 기색이길래 민이헌은 뭘 먹을지 잠시 고민했다. 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있던가? 여하간 민이정과의 만남은 이런 내용이었고, 저녁을 두둑이 먹였다. 그래 봐야 둘 다 소식하는 인간들이라 겨우 2인분이 한계였다. 하찮은 양이었다. 그래도 사슴식단은 아니었다. 정말로.
민이정과 다시 만난 날은 해가 쨍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이 우중충한 것 같았는데. 날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민이헌은 민이정의 차를 얻어탔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형 혼자 다녀와.”
“넌 안 가게?”
“오랜만에 왔잖아. 형 혼자 누나 만나보는게 나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나 좀 이따 애인한테 전화해야 해.”
사람들이랑 잘 못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애인이 있었구나. 속으로 그 말을 삼킨 민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짧게 말하고서 걷기 시작했다.
민이헌의 누나, 민윤영은 수목장했다. 민윤영은 생전에 물을 무서워해서 바닷가에 뿌리지 못했다. 언젠가 갔던 외할머니의 납골당은 갑갑해 보여서 언젠가 죽어도 이런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했었다. 땅에 묻자니 관속은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수목장했다. 생전에도 까다로웠던 누나였기에 수목장이 마음에 들지는 모르지만, 나무와 하나 되는 건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민윤영은 식물을 좋아했고, 매달 한 번은 꼭 온실이나 수목원에 가고 싶어 했으므로.
민이헌은 산책로처럼 잘 닦아둔 길을 따라 걸었다. 수목장에도 헌화해도 되는지 잘 몰라서 꽃은 사지 못했다. 누나는 프리지아를 좋아했는데. 민이헌은 천천히 걸어 한 구역에 도착했다.
나무는 빼곡하지 않게 일정한 간격으로 식목 되어 있었다. 영생목으로 고른 나무는 산수유였는데, 날이 따뜻해서인지 벌써 동글동글한 꽃망울이 맺혀있었다. 며칠 내로 피겠네. 민윤영이 묻힌 나무를 찾아 그 앞에 간 민이헌은 쭉 뻗은 가지들을 봤다. 잘 관리된 나무는 제멋대로 가지가 뻗치지 않고 가지런했다. 민윤영은 노란 꽃을 좋아했다. 프리지아 같은 거. 산수유나무를 고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화사한 꽃나무 아래서 좋은 곳으로 가라고.
민이헌은 17년 만에 온 누나의 나무 앞에 서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런 모양의 나무였던가. 기억이 흐릿해서 처음 봤던 나무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애초에 장례식부터 화장, 그리고 나무 밑에 누나의 뼛가루가 묻힐 때까지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그게 슬펐다. 누나가 가는 길을 똑바로 봤어야 했다. 나약했던 열다섯 민이헌은 그러지 못해서 현재의 민이헌이 안타까웠다. 누나는 무서웠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안녕, 누나.”
내내 침묵하던 민이헌이 첫 인사를 건넸다. 바람은 불지 않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입춘이 지나 봄으로 접어든 날은 부드러운 햇살을 선사했다. 겨울의 여린 햇살보다는 조금 더 온기를 품은 채로 내려 온 세상을 환히 비췄다. 민이헌은 그게 좋았다. 누나를 만나러 온 날이 좋아서 좋았다.
“너무 오랜만에 왔어. 그렇지? 그동안은 내가 너무 무서워서 못 왔어. 누나도 알잖아. 난 누나가 없는 게 제일 무서웠다는 거. 내가 누나를 너무 좋아한다고, 좀 떨어지라고 말했었던 것도 기억나. 그동안 기억이 엉망진창이었는데, 하나를 떠올리기 시작하니까 조금씩 많은 것들이 생각났어. 누나가 떠나서 힘들었지만, 누나가 있어서 행복했던 때들 말이야.”
누나가 앞에 있는 것처럼 민이헌은 나직하게 말했다. 민이헌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악마의 장난감 상자에 들어갔던 이야기까지 전부. 듣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말이 길게 이어졌다. 무대 위에서 독백하는 배우처럼 그렇게 했다.
“사실은 누나, 난 아직도 무서워.”
누나가 좋은 곳에 못 갔을까봐, 아직도 그 음악실을 배회할까봐,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봐. 그게 너무 두려웠다. 그렇게 괴롭게 떠난 누나는 영원한 16살에 멈춰있다. 그 채로 아직도 고통받고 있을까봐 그게 무서웠다. 사후세계의 존재가 없었으면 싶기도 했고, 있어서 누나가 좋은 곳에 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악마도 있는 세상에 사후세계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누나를 잡고 있었다면 어쩌지.”
민이헌은 오랫동안 소년인 채로 멈춰있었다. 누나가 죽은 이후로 자라지 못한 어린애였다. 누나를 보내주지 못했다. 그런 민이헌에게 악마의 장난감 상자는 마지막 연주를 종용했다. 관객들의 목소리를, 무대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민이헌이 나아가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제 그만 도망치려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거든.”
잊어선 안 된다. 아무리 고통스러웠어도 도망쳐선 안 되었다. 넘어져도 몇 번이고 일어나야 했다.
“일기도 써. 매일매일 오늘을 기록해. 그렇게 하니까 잊어버리지 않는 건 물론이고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 같아. 그래서…, 누나에 대해서도 쓰려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으로 채워야 한다. 새로이 쌓이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었다. 구멍 숭숭 뚫린 스펀지 같은 머리에 쌓고 싶었다. 그 사이에 누나와의 추억도 잊고 싶지 않았다. 악마의 장난감 상자에서 본 누나는 웃고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아서 그곳에서 나오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결국 민이헌은 나왔다.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선택했다. 포기하지 않고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나, 근데 누나가 보고 싶어.”
목 안쪽에서 울컥 솟구치는 것이 불덩이 같아서 목소리가 흐려졌다. 민이헌은 자랐다. 그렇지만 아직 덜 자란 모양이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은 보내줘야지 하면서도 누나가 너무 보고 싶었다. 참고 싶었는데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누나에게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의연하게 잘 지낼 거라는 얘기만 하고 싶었는데. 오래된 그리움이 뚝뚝 떨어졌다. 누나, 나는 누나 없이도 잘 지낼 거야. 열여섯 어린애에서 졸업하고 앞으로 나갈 거야. 흐느끼느라 목소리가 조각조각 끊어지면서도 꿋꿋하게 말했다. 엉망진창이었다. 눈물이 나니 감정이 휘몰아쳐서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진다. 민이헌은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다시 흘러내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흔들린다.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달아오른 뺨을 식힌다. 민이헌은 다시 눈물을 닦아내고 누나의 나무를 본다. 이 바람이 좀 더 따뜻해지면 꽃이 피겠지. 샛노란 산수유 꽃이 예쁠 텐데.
민이헌은 엉망인 얼굴을 겨우 정돈하고 나무를 봤다.
“나 좀 어린애 같지. 그래도 괜찮아질게. 누나가 걱정하지 않게, 인제 그만 졸업하고 어른이 될 거야.”
서른셋이나 먹은 주제에 인제 와서 어른이 되자고 마음먹은 것도 우스웠다. 어쩔 수 없지. 어쩌면 민이헌은 조금 늦었다. 너무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었다. 이제야 기지개를 켰다. 그러니까 더 나아질 것이다. 봄이 올 것이다. 꽃이 필 것이다. 누나를 떠올려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을 것이고, 구멍 뚫린 자리는 좋은 기억으로 채워야지. 괜찮을 것이다. 괜찮다.
흐트러졌으나 단정한 얼굴이 웃는다.
“갈게. 다음엔 바이올린을 가져올게.”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린다. 민이헌은 다시 천천히 걸었다. 이번에야말로 조금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를 쓸어 만지는 바람이 분다. 성큼 다가온 봄이 발걸음 뒤를 쫓는다. 그걸로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어른소년이 자란다. 졸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