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다. 아주 오래 잔 것처럼 개운했다. 연화는 눈만 뜨고 움직이지 않은 채 침대 옆 협탁을 봤다. 오전 8시.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 강습은 낮부터 있었기에 부지런히 화실에 나가야 했다. 아이들에게 나눠줄 조그만 선물도 사야 했고. 하품하고 일어난 연화는 문득 긴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얀 종이로 포장한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꿈이었을까? 연화는 잠깐 골몰했다가 이내 그만뒀다. 꿈은 현실이 아니다.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지.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서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이었다.


*


 화실로 출근하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안녕하세요, 연화씨. 오늘은 무슨 꽃을 사러 오셨나?”


 자주 들른 탓에 익히 얼굴을 아는 주인이 인사를 건네오는 것에 연화는 방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모처럼의 크리스마스니, 화실에 꽃을 좀 두려구요.”

 “크리스마스면 역시 포인세티아지. 화분 좀 드릴까요?”


 낮은 화분에 빨갛게 물든 포인세티아가 보였다.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식물. 꽃같지만 사실은 꽃이 아닌 그 붉은 잎을 물끄러미 보던 연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포인세티아도 좋지만….”


 연화는 꽃집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그걸 살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주인의 추천대로 포인세티아를 샀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왠지 다른 꽃을 사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눈에 걸렸다.


 “흰 작약이네요.”


 이 계절에 작약이라니. 본래 오뉴월에 피는 꽃이 아니던가? 별일이라는 듯 놀라는 목소리에 주인이 멋쩍은 듯이 말했다.


 “와이프가 작약을 좋아해서요. 한참 찾았지 뭡니까. 세상 많이 좋아졌어요, 요즘 같이 추운 날에 작약도 나오고.”

 “어머, 그래요?”


 그러고보니 이 사람은 아내사랑이 끔찍했다. 아내가 꽃을 좋아해서 꽃집까지 차리게 됐다던 주인은 종종 이런 식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꽃을 들여오곤 했다. 누구 하나 사는 사람이 없어도 그저 아내가 보고 싶다면 구해 오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연화는 구하기 어려운 꽃들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좋았지만.


 “그럼 작약 한 다발 주시겠어요?”

 “예,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인이 꽃을 골라 포장하는 사이 연화는 꽃집 내부를 살살 살폈다. 다른 가게보다도 유난히 특이한 꽃들을 많이 가져다 두는 이 가게를 연화는 참 좋아했다. 입구만 보면 조그만데, 막상 들어오면 정글처럼 우거져 있어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꽃을 사는 일은 조그만 기쁨을 사는 일처럼 느껴지곤 했고, 연화에게는 즐거운 취미 중 하나였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히 결제하고서 연화는 꽃집을 나섰다. 작약 한 다발. 눈도 내리지 않은 크리스마스였지만 흰 작약을 들고 있으니 공연히 마음이 설렜다. 이 작약이 붉게 물들었다면 그것도 참 예쁘지. 문득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 다음엔 작약을 ‘재료’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화는 과자점에 들러 쿠키를 샀다. 다섯 조각씩 나눠 들어있는 쿠키 봉투들을 한 아름 사 들고 돌아가는 길이 손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화실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을 열자 밤새 차가워진 내부에 절로 몸이 떨렸다. 연화는 몸을 부르르 떨고서는 보일러와 난로를 켰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화실을 따뜻하게 만들어놔야 했다. 게다가 추운 데서 작업하면 손이 얼어 섬세히 그리기도 어려웠다. 애당초 추운 곳에서 작업할 이유도 없지만. 연화는 코트와 목도리를 벗을 생각도 못하고 쿠키들을 한쪽에 내려놓은 다음, 작약을 꽂을 화병을 찾았다. 화병을 보니 문득 향수가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화병에 향수를 느낀다니. 고개를 한 번 내젓고, 물을 채우고, 작약을 꽂았다. 화실에 두니 한결 환해진 기분이 들었다. 만족스러워. 연화는 한번 웃고서 커피를 내리기로 했다. 아직 춥지만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면 나아질 것이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적당히 따뜻해진 내부온도에 목도리와 코트를 벗었다. 홀로 있는 화실은 좋았다. 조용했고, 물감 냄새가 기분 좋았다. 조만간 축음기 같은 것도 살까. 음악을 틀어놓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조용한 가운데서 작업을 하는 것도 좋았지만, 음악을 틀어놓으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간이 되지 아이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오는 아이들에게 마주 인사를 건네고 쿠키 한 봉투씩 건네줬다. 큰 선물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기뻐졌다. 소소하지만 즐거운 크리스마스였다. 매년 같은 크리스마스지만 올해는 왜 이렇게 더 즐거울까? 연화는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선생님, 이거 이렇게 하면 돼요? 아이들의 질문세례가 이어졌으므로.


*


 수강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화실을 정리한 뒤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어둠이 내려있었다. 동지(冬至)가 지나서인가 해는 유독 빨리 졌다. 여름 같았다면 아직 한 낮이었겠지. 연화는 목도리를 고쳐 두르고 걸음을 재촉했다. 날은 추웠다. 겨울은 겨울이었다. 거리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고 구세군 냄비의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왁자한 길에는 거리거리마다 커플이 쌍쌍이었고, 반짝이는 네온 장식으로 가득했다. 이상한 일이지. 이 모든 게 꿈같다니. 평소와 다를 것도 없었다. 단지 크리스마스에 불과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거리는 며칠 전부터 그랬고, 데이트하는 연인들도 수도 없이 봤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울렁이고 이상한 기분이 들까?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수도 없이 들었다. 떠오르는 것도 없었고, 특별할 것도 없는데 왜.


 남들은 다 크리스마스라고 약속이 있었다지만 연화는 만날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은 애인과 혹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했다. 가족들도 굳이 연화를 부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데이트, 동생은 친구들과 함께.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익숙했다. 집에 가거든 며칠 전 선물 받았던 샴페인을 따는 것도 좋겠다. 케이크라도 사갈까, 하는데 문득 눈에 걸린 것은 서점이었다. 연화는 홀린 듯이 들어갔다. 살 책도 없는데, 한참을 헤매다 눈에 걸린 것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집에 가는 길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크리스마스라고 다른 일은 전혀 없었다. 새해가 돌아오면 선 자리가 들어올 것이다. 지난번 본가로 돌아갔을 때 넌지시 말해오는 것이 새해에는 좋은 집안 남자를 소개시켜 줄 요량이었다. 좋은 집안. 좋은 남자. 하지만 그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참지 못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버릴지 모르고, 아름답지 않다면 거부할 터였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거미 같은 여자의 입맛에 맞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다.


 홀로 사는 집은 캄캄했다.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다. 고양이를 키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자신은 어느 생명 하나를 키울 자격이 못 됐다. 연화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작품 활동’이 살인이라는 자각쯤은 있었다. 다만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동시에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예술가이기에 예술을 하는 것뿐이다. 사람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이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으니 연화는 앞으로 평생 가도 그 조그만 생물을 키울 생각을 하지 못할 터였다. 피를 묻힌 손으로 뭔가를 키운다는 건 배덕하지 않은가.


 연화는 들어오는 길에 사온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서 샴페인을 꺼냈다. 목도리를 풀고, 코트를 벗어 소파 위에 걸어두고, 적막한 밤의 평화를 즐기기로 했다. 외롭지는 않았다. 연화는 잔에 샴페인을 채웠다. 예쁜 빛깔의 술이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 케이크를 꺼내고 포크를 들었다. 달콤했다.


 “음….”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 연화가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포크를 문 채로 아까 서점에서 사왔던 책을 꺼냈다. 백석의 시집이었다. 연화는 시를 잘 몰랐다. 뭔가를 읽는다는 것에서 편식이 심했고, 주로 읽는 것은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시집을 골라잡았을까? 그건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처럼도 느껴졌다. 연화는 생각 없이 시집을 펼쳤다. 수라라는 제목의 시가 있었다.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기묘한 시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연화는 한참이나 시집을 펼쳐놓고 그 구절을 읽었다. 한참이나. 묘하게 반갑고 묘하게 그리웠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연화는 물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나 음악을 틀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거실의 이젤 앞에 가서 앉았다. 사각거리는 연필소리가 한참이나 들렸다. 아무래도 좋은 메리 크리스마스가 끝나가고 있었다.




 화실에 나간 도연화의 집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익숙하지 않은 시집과,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진 캔버스를 두고서.






도연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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