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샀고. 파 있고. 마늘도 있고. 딸기도 한 팩 골랐고. 햄 샀고, 당근도 샀고…. 조용희는 쇼핑카트에 채워 넣은 물건들을 살폈다. 뭘 더 사야 하더라. 냉장고가 텅텅 비어서 장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며칠 간은 귀찮아서 라면이나 끓여 먹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용희는 면보다는 밥을 좋아했고, 삼시 세끼 중 한 번은 꼭 밥이 있어야 했다. 지난 며칠은 게으름을 피우느라 그냥 넘겼다지만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밥이 먹고 싶었다. 집에 앉아 인터넷으로 장을 봐도 되긴 했지만, 저녁 시간이 코앞이라 그도 여의치 않았다. 덕분에 조용희는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를 했다. 역시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오랜만에 오는 마트는 썩 나쁘지 않았다.


 유제품 코너를 돌다가 마침 보인 달걀 한 판을 집어 들어 카트에 넣었다. 조용희는 카트에 채운 것들을 보며 며칠이나 먹을지 가늠했다.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었지만 둘이 먹기엔 적당한 양이었다. 조용희는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둘인가? 그 이유는 며칠 전 객식구가 하나 늘었기 때문이었다.


 객식구. 그게 누구인가 하면은 조용희로서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래브라도라이트. 보석의 이름을 가진 선택받은 자. 친하다고 하기엔 악연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탓이다. 그 남자와 함께 있으면 조용희, 아니 녹턴은 일방적으로 짜증을 내곤 했다. 그 유들유들한 태도나 얄밉기 짝이 없는 언사 탓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객식구로 들어왔다. 별난 일이었다. 래브라도라이트와 녹턴을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무슨 바람이 불어 집에 들였냐고 물어도 이상치 않았다. 녹턴으로서도 그를 왜 집에 들였는지 스스로 이해하긴 어려웠다. 물론 마냥 싫은 인물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름대로 미운 정이 붙어서 막상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녹턴의 앞에 나타난 래브라도라이트는 검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보라색이 도는 검은 날개에 고동색과 회색이 섞인 아름다운 날개.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만난 래브라도라이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떤 존재인가. 묻자, 래브라도라이트는 악마가 되었다 했다. 악마라. 별난 일이었다. 이전의 신은 자신의 여흥을 위해 세상에 산재해 있던 천사와 악마를 모두 먹어치웠다고 했다. 그래서 남은 천사도, 악마도 없었다. 하지만 래브라도라이트는 그 후에 악마가 되었다. 세상에 남은 유일무이한 악마라는 의미였다. 그게 황당해서 녹턴은 헛웃음밖에 흘릴 수 없었다. 물론 녹턴이 뭐라고 말한다 한들 관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악마가 된 래브라도라이트는 그날을 기점으로 녹턴의 집에 얹혀살게 됐다. 집이 어디냐 했더니 돌아갈 곳이 없다기에 그냥 예서 살아라, 라고 말한 탓이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래브라도라이트를 붙잡은 것은 녹턴이었다. 자신도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막상 만나니 그냥 보내기 어려운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왜, 흔히 있지 않은가. 거리를 떠도는 개나 고양이를 보면 데려다가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 겨우 그 정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말 그게 맞는지는 자신도 판단하기 어려워 예상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객식구가 늘었으니 더는 라면으로 때울 수도 없었다. 악마라고 했으니 굳이 먹지 않아도 될 것 같기야 하지만 입이 있는데 안 처넣어줄 순 없었다. 녹턴은 누군가 앞에 두고 혼자 음식을 먹을 정도로 매정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녹턴은 장을 보러 나왔다. 자신도 먹고, 래브라도라이트도 먹일 겸 해서였다. 래브라도라이트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아니 사실 애초에 외국인이었으니 한식을 먹어나 봤는지도 모른다. 녹턴은 나름대로 고민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로 했다. 집주인은 자신이었고, 객식구면 객식구답게 주는 밥이나 먹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면 폭정 같았지만 어쩌겠나. 래브라도라이트를 위해 입에 맞지도 않은 푸아그라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거위의 지방간 따위를 구할 일도 만만찮았다.


 그래도 오므라이스 정도는 먹겠지. 서른이 넘은 놈이 밥투정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 하나? 잘 모르겠다. 래브라도라이트와 팔자 좋게 마주 앉아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녹턴은 나름대로 고심하며 토마토케첩 하나를 카트에 담았다. 얼추 장보기는 끝났다. 그래. 안 먹는다고 하면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쑤셔 넣자. 암. 그래야지. 안 먹는다고 지랄하면 말이여. 녹턴은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계산대로 갔다.






 “내 왔다.”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녹턴이 집에 들어왔다. 해가 서산에 거의 넘어가 집안은 어둑했다. 돌아오는 소리도 없었다. 녹턴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신발을 벗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나갔나? 우선 장바구니를 주방에 가져다 놓고 거실로 온 녹턴은 이내 소파 위에 웅크린 누군가를 발견했다. 래브라도라이트였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그 아름다운 날개로 몸을 감싼 채 잠들어있었다. 얼씨구. 낮잠이라도 자나? 녹턴은 한쪽 눈썹만 찌푸린 채로 래브라도라이트를 내려다봤다. 잠든 얼굴은 평온했다. 평소처럼 얄밉기 짝이 없는 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고, 늘 그렇듯 방글방글 웃지도 않았다. 풀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개를 주운 건지, 고양이를 주운 건지, 악마를 주운 건지 몰겠네. 목구멍 안쪽으로 그 말을 삼키고서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낮췄다.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며칠 동안 자는 걸 거의 못 봤는데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신기했다. 그 실실대는 얼굴이랑 안 맞게 경계를 했나? 짐승 같네. 실례되는 생각을 잘도 하며 한참이나 래브라도라이트를 보고 있다가, 오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하나 꺼내왔다. 그리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몸을 감싼 날개 위에 얹듯이 덮어줬다. 감기에 걸릴 것 같진 않았지만, 못내 신경이 쓰였다. 잘거믄 방에 가서 잘 것이지. 래브라도라이트에게 방을 내주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녹턴이 사는 이 집에는 방이 세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서재, 하나는 자신의 침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손님방으로 썼다. 손님이 올 일이 없어 그냥 빈방이나 다름없던 방을 래브라도라이트에게 내줬더란다. 자기는 좋은 침대 아니면 안 잔다고 헛소리를 하기에 그 방에 있는 침대는 비싸고 큰 침대라고 짜증을 냈던 것도 기억이 났다. 큰 침대라고 하니 만족했으면서 왜 소파에서 자는 거람. 소파도 제법 크기야 했지만, 침대보다는 불편할 것이 분명했다. 


 쯧. 녹턴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혀를 찼다. 자기 생각은 모르고 여전히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래브라도라이트를 한참 보다가, 녹턴은 문득 손을 뻗었다.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쓸어넘겨 줬다. 잘 때 만큼이라도 조용하믄 어디 덧나나? 하기야 입 닥치고 있는게 어색한 인물이지만서도. 녹턴은 혀를 쯧쯧 차다가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곧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것이었다. 그 전에 밥을 하고, 오므라이스를 만들자. 접시에 올리고 달걀 지단과 케첩으로 예쁘게 장식해야지. 그 다음에 래브라도라이트를 깨우면 될 터였다. 얄밉고 짜증나는 말만 하는 인간, 아니 악마였지만 함께 하는 식사시간은 좋았다.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자아. 시작혀볼끄나.”


 녹턴은 기지개를 켜고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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