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 그 자체일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적어도 녹턴은 그랬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임을 한순간도 의심해본 적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녹턴은 자신이 인간인지 아닌지 명확히 말할 수가 없었다. 신에게 선택받았을 때도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혼이 검게 오염됐을 적에는 차마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신은 녹턴에게 이르길, 반마물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반마물. 반은 인간이지만 나머지 반은 마물이었다. 녹턴이 수도 없이 베어 쓰러트린 그 어둠의 존재였다. 그렇다면 녹턴은 온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아니라고 생각했다. 녹턴은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답고 싶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녹턴은 심판자가 된 순간부터 인간일 수가 없었다. 이미 그때부터 영혼은 오염되어있었다. 10년간 그 채로 살아왔다. 신이 건 금제로 죽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살아있기만 했다. 그래서 변신을 한 모습인 채로 계속 지냈다. 아직 반은 인간이었으니 변신상태를 해제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불안했다.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변할까봐. 녹턴은 늘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 했지만, 기저엔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무서워할 것 없어쮸. 어차피 겉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해쮸. 그러니까 녹턴이 알던 모습일거야쮸. 비록 녹턴은 이미 인간이 아니지만쮸.
쮸쮸쮸, 하며 웃던 신이 떠올랐다. 천진한 어린아이 같던 신은 잔혹했다. 그저 놀이로, 호기심으로 인간의 영혼을 주물렀다. 따르기 싫어도 따를 수밖에 없었고, 고개 숙이고 싶지 않아도 숙일 수밖에 없었다. 신은 절대적이었다. 이 세계에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신이 유일했다. 그래서 녹턴은 순응했다. 비록 신의 멸망을 바랐어도.
녹턴은 어둠 속에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예정된 마지막을 장식했다. 심판의 기요틴 아래 앉았다. 요요히 빛나는 칼날이 떨어졌다. 검게 물든 사과의 보석을 낫으로 갈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연습 한 번 하지 않았는데 어느 것 하나 엇나가지 않았다. 고통이 있었던가 없었던가는 잊어버렸다. 의미 없는 것이었으므로. 마지막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지만,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고통은 아무래도 좋았다. 녹턴이 바라던 끝이기도 했다. 지겹게 휘둘리다가 그제야 해방될 수 있었다. 영혼이 담긴 보석이 갈라지자 겨우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던 몸이 무너졌다. 재가 되어 퍽석 주저앉은 몸은 재구성되어 마물이 되었다. 녹턴은 자신이 어떤 형상의 마물이 되었는가는 알지 못한다. 마물이 되었어도 의식이 있긴 했으나 끊어질 듯 연약한 것이었으므로 그 기억은 흐리기만 했다. 드문드문 구멍 난 기억은 꿈결 같았다. 희미한 기억 속에 누군가 이름을 불러줬던 것 같았지만 금세 잊어버렸다. 다 끝난 일이었다. 녹턴은 어둠 속에서 부유했다. 무중력의 세계는 의식의 저편. 몸이 부서졌고, 영혼이 담긴 그릇은 갈라졌으니 찰나의 영원에 머물러있는지도 모른다. 녹턴은 삶에 미련 없었다. 후회는 했지만, 미련은 남기지 않았다. 남겨둘 것이 없는 탓이었다.
다만, 미안했다. 녹턴은 자신의 끝을 알고 있었고, 누구에게도 정을 붙이지 않으려고 했다. 한걸음 물러선 곳에서 지켜보며 선택받은 자들이 망설이지 않고 저를 물리칠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심이 약했던 모양이었다. 녹턴은 금세 휘말려버렸고, 오지랖을 부렸으며, 정을 주고야 말았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뭘 할 거냐 묻는 것에 자신은 죽을 거라고 대답하지도 못했다.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긴 휴가를 간다고만 했었다. 긴 휴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돌아오지 못하는 긴 휴가였고, 비로소 찾을 안정일 테니까.
녹턴은 언제나 부채감과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먼저 떠난 가족들에게, 그리고 떠나버린 동료들에게. 부채를 갚을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목숨값과 자신의 목숨값이 같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틀리다는 것은 아니나 그들 전원의 목숨과 제 목숨 하나가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속죄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으로 10년을 버텨왔다. 그래서 녹턴은 이번에 만난 그들이 부채감도 죄책감도 뭣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 그들은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 믿었다. 자신들과는 달랐고, 뿌려놓은 이야기의 조각들 사이에 힌트를 넣어놨으니 그걸 봤다면 분명.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들은 멍청하지 않았으니 길을 찾았으리라. 제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그러리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그누가 신이 됐을까? 우승에 가장 가까웠던 자가 이그누였으니 신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기적인 소원을 빌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신의 자리에 어울릴 것이다.
녹턴은 부유하는 어둠 속에 몸을 내맡겼다. 해먹 위에 누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누워있어도 좋다는 생각이 스쳤다. 몸의 힘을 한껏 풀고 부유하고 있노라면 어디론가 흘러가 버려도 좋다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 이대로 사라져버리는 걸까? 슬슬 졸음에 노곤하게 감기는 눈에 생각했다. 영혼이 든 핵을 갈랐으니 남은 것은 소멸뿐이다. 언제쯤 사라지려나. 이곳에서 느끼는 체감시간은 긴 것 같으니 한참이 걸릴지도 모른다.
윤회가 없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윤회가 있고, 다시 태어난다면 몇 번이나 생을 반복하는 것일 텐데 그건 싫었다. 사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삶은 늘 경이로운 것이었으므로. 그런데도 싫다고 말하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다시 인생을 살게 되면 저지를 실수들이 두려웠다. 그 후에 밀려들 후회와 회한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생이라면 더 이상의 것은 없기를 바랐다. 녹턴은 두려움이 많은 겁쟁이였다. 섬세하다면 섬세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드러내기 싫어서 거친 언사를 해대긴 했지만, 그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젠 다 끝난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좋다지만.
눈을 감으려는데, 빛이 보였다. 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 온화한 금빛이 타올랐다. 녹턴은 부유하던 몸을 일으켜 그 빛을 응시했다. 빛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니, 가까워지는 걸지도 모른다. 녹턴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금빛의 빛무리가 손끝에 달라붙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빛무리가 달라붙은 손끝을 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녹턴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쫌 끝내주지. 뭣 하러 부르는 거여. 투덜거리면서도 웃음이 났다. 윤회는 아니다. 기억을 잃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삶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았다. 미련은 없었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삶을 받아들여도 될까? 오래 생각할 것은 없었다. 언제든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바란다면 이뤄줘야지.
녹턴은 빛무리 속에 몸을 던졌다.
에필로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