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전 연다며? 기집애. 그렇게 빼더니 결국 하는구나.”


 다솜의 말에 연화는 민망한듯 웃었다.


 “부모님이 자꾸 설득하시잖아. 난 나서는 거 별로 안 좋은데 어쩔 수 없지 뭐.”

 “원래라면 했어도 벌써 해야 했어. 난 너 작품전 여는 거 올해엔 볼 수 있을까, 매년 생각했어, 얘.”


 대학동기이자 친구인 그녀의 말에 연화는 대답 않고 웃기만 했다. 손 안의 머그컵이 약간 뜨거웠다. 이대로 마시면 입을 델 것이 분명했다. 커피가 가득 든 컵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며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올해도 사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왜?”

 “…그냥. 왠지 열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그 말 그대로였다. 이전 같았다면 고집을 부려 하기 싫다고 했겠으나 이번엔 이상하게도 열고 싶어졌다. 이유도 모를 뭔가가 기다려졌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요즘의 연화는 이상했다. 뭔지도 모르고 그리워하고 이유 모를 상념에 빠질 때가 많았다. 꼭 천 한 꺼풀 덮어놓고 가려진듯 모를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상했는가 한다면 거슬러 올라가 지난 성탄절부터였을 터였다.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시집을 사고, 기억에도 없는 의자를 그려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연화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너도 참 특이하다. 다른 애들은 작품전 열고 싶어서 안달인데. 넌 다 갖춘 애가 안 그러더라.”

 “하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는걸.”


 이번만은 다르지만. 연화는 작게 웃고서 커피를 후우 불고서 조심조심 마셨다. 아직 뜨거운 커피는 바로 마시기 버거웠지만 향이 좋았다.


 “그래서 주제가 뭔데?”


 연화는 그 말에 다시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뜨끈한 온도에 이제 손이 적응해서 쥐고 있으니 따뜻했다. 커피 위로 약간의 거품이 떠오른 것을 보며 연화는 웃었다.


 “악몽.”


*


 가장 좋아하는 흰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새하얀 원피스는 연화가 가장 좋아하는 옷 중 하나였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어릴 적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부를 동경해서였다. 지금은 그때의 그 마음은 아니었지만, 공연히 좋아서였고. 새하얀 원피스가 연화에게 잘 어울린다는 점도 한몫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이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것도 참 좋은 일이었다. 연화는 방 안에 있는 거울에 제 몸을 한번 비춰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어디에 데이트를 가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연화는 오늘 소소한 외출을 할 예정이었다. 간혹 강습이 없고, 그림 그릴 기분이 나지 않으면 연화는 화실에 나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외출하곤 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연화는 지갑과 간단한 소지품을 넣은 클러치백을 들다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차키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가보지 않은 곳에 가봐야지.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동을 켜고, 네비게이션에 입력했다. ㄴㅏㅁㅅㅏㄴㅌㅏㅇㅜㅓ. 남산타워. 지금껏 서울에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아직은 날이 제법 춥지만 그래도 엊그제보다는 덜 추웠다. 영하의 온도에서 영상으로 올라갔으니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평일 낮이라 그런지 남산타워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러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틈에서 연화는 정문으로 향했다.


 오늘은 케이블카를 타볼 생각이었다. 남산타워 하면 케이블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연화는 정문에서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나오며 머리에 쓴 검은 베일이 바람에 흩날렸다. 연화는 저를 힐끔힐끔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거기에 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뭘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기다리다니.


 “약속한 것도 없는데.”


 괜히 소리 내서 중얼거렸다. 정말 약속한 게 없었던가? 아니면 잊어버린 건가? 연화는 알 수가 없었다. 약속했다면 잊어버릴 리가 없다. 연화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었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거짓말을 아주 안 하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거짓말을 할 바엔 입을 다무는 게 도연화였다. 그랬으니 약속을 했다면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그럴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 걸까? 왜 이런 기시감이 드는 걸까?


 그 성탄절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의문을 품고서 연화는 한참동안 정문 앞에 서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을 품에 안고,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도연화, 에필로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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