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화의 개인전이 열렸다. 부모의 지인들, 도연화의 지인들이 보낸 화환이 입구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연화는 그 화환들을 물끄러미 봤다. 이 화환을 보낸 사람 중에는 연화가 만났던 사람도 있었고,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나 부모의 지인들이 그랬다. 이 세계가 원래 그렇다고는 하나 얼굴 하나 알지 못하는 지인의 딸을 위해 이런 것을 보내는 것도 사실 웃기는 일이었다. 적어도 연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성의가 있다면 차라리 불우이웃에게 기부라도 더 하지. 속으로 신랄한 생각을 삼키고서 연화는 갤러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연화는 사실 근래 들어 예민해진 상태였다. 제 아무리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연화는 자기의 속내를 잘 알았다. 도연화는 겉과 속이 다른 여자였다. 남에게 솔직한 것은 솔직했다. 그러나 솔직했다 뿐이지 진심을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었던가.
‘잡담만 하지 중요한 건 말 안 하잖아요.’
호경, 그러니까 하준영이 약속을 지키러 왔었다. 그의 방문에 물밀 듯이 떠오른 기억 중엔 그런 말을 들은 기억도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연화는 잡담하는 일은 많았지만, 그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겉으로만 보는 도연화라는 여자는 무해하고 온화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면 거미나 다름없었다. 짝짓기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는 거미처럼, 도연화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박제하곤 했다. 그러나 ‘그 날’이 지난 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 날’,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후로. 그 악몽 아닌 악몽 이후로 그랬다. 혹자는 그 일들을 악몽이라고 부를 터였다. 피비린내 나는 그 세계가 악몽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연화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이상향이었다. 아름다운 사람을 박제해도 되살아난다. 죽지 않는다.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가도 다시 꽃이 피듯 되살아났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깨닫고야 말았다. 박제하는 것만이 온전한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연화가 아름다움을 위해 박제하는 일을 그만 둔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하준영이 그렇게 물었다. 자신에게 오라고 하여 기억이 되살아난 일에 대한 물음이었다. 연화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그렇게 대답했었다. 도연화라는 여자는 보기보다 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자신의 것이 타의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싫었다.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좋은 기억이었건 나쁜 기억이었건 그걸 어떻게 할지는 연화에게 달려있었다. 그 어떤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현재의 연화를 만들어낸 기틀이 되었으니 더 했다. 아마 기억이 없었다면, 아니 ‘그 날’의 일들이 없었다면 도연화는 여전히 살인을 하고, 그 시체로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이 변화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그 분기점이 된 사람은 바로….
“도연화!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누군가 말을 걸어 돌아보니 친구인 혜진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적부터 친했던 그녀는 연화의 전시회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전화해서는 축하한다고 한 인물이기도 했다. 작년, 사랑하는 사람과 꿈에 그리던 결혼을 하고 얼마 전 임신을 했다며 기뻐하던 그녀였기에 연화는 그녀의 방문이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혜진아. 밖에 나와도 돼? 집에서 쉬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기도 한데, 야. 내 친구가 개인전 연다는데 안 오면 그게 친구냐? 그리고 적당한 운동은 오히려 도움이 된답니다, 아가씨~?”
“그렇담 다행이지만. 안쪽으로 들어가서 앉자.”
혜진에게서 꽃다발을 건네받은 연화가 안쪽의 자리를 안내했다. 혜진처럼 찾아온 사람들과 편안히 대화하기 위한 작은 공간이었다. 파티션 하나로 가려놓기야 했지만, 커피메이커도, 하얀 테이블도 있어 제법 그럴싸했다.
“누가 먼저 왔다갔었어?”
아직 채 치우지 못한 잔들을 보며 혜진이 물었다. 연화는 다 마신 커피잔들을 치우며 웃었다.
“응. 아는 사람.”
“남자?”
“응. 근데 너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니까 헛물 켜지 마.”
“…어우, 기집애. 야, 우리도 낼 모레면 서른이야! 너도 좋은 남자 하나 잡아야지!”
시작됐다. 이전엔 안그러던 혜진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주변에 적극적으로 결혼을 하라며 바람을 넣고 다녔다. 연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연화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집안에서 슬슬 선을 봐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나와도 싫다고 딱 잘라 말할 만큼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결혼을 한다면 하다못해 아름다운 사람과 해야 하는데 연화의 취향에 맞는 아름다운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걸 말해봐야 집안에서는 선자리를 들이밀기 바빴지만.
“그렇잖아도 선 볼거야.”
“어머, 정말?”
“응. 그런데 좋은 사람 만날지는 모르겠어.”
어차피 퇴짜 놓을 거거든. 그 말을 삼키며 연화는 커피를 내렸다. 준영이 가져다준 커피는 향긋했다. 그리고 혜진에게 줄 율무차를 따로 탔다. 자신의 커피 한 잔, 혜진의 율무차를 양손에 각각 하나씩 들고서 연화는 테이블 앞으로 돌아왔다.
“하긴, 선이라는게 조건 보고 만나는 거니까. 그래도 얘, 조건 좋고 괜찮은 남자다 싶으면 냉큼 잡아버려.”
“응, 그럴게.”
내키지 않으니 그럴 생각 없지만. 겉과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며 연화는 웃었다. 혜진의 결혼 예찬론이 다시 시작될까봐 연화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주변 친구들 근황이라거나, 혜진의 요즘 생활을 물어보니 임신 중의 여러 고초 사항을 말하느라 혜진은 정신없었다. 한참이나 떠들던 혜진은 남편의 연락을 받고 돌아갔다. 연화는 혜진을 배웅하고서 갤러리로 돌아왔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 몇이 보였다. 연화는 그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연화 개인전, 악몽.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이곳에 있었다. 연화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마침내 그림 하나 앞에 섰다. 하얀 바탕에 덩그러니 그려진 의자 하나가 놓인 그림이었다. 단순하고 간결했지만 보고 있으면 의자 위의 보이지 않는 인물에게 말을 걸고 싶어지는 기묘한 그림이었다. 연화는 그림의 제목을 봤다. 시발(始發). 악몽의 시발점. 기억도 못 하면서 이런 그림은 어떻게 그려낸 걸까. 어쩌면 기억의 위에 덮인 그 얇은 천이 바람에라도 흔들렸는지 모른다. 연화는 물끄러미 그 그림을 보다가 이내 웃으며 몸을 돌렸다.
멈춰있던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잊고 있던 것을 찾아 나가는 것도 일이지. 연화는 느릿느릿 갤러리 밖으로 나왔다. 2월이지만 썰렁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자신은 분기점에 들어섰다. 이 이후의 선택은 오롯이 자신, 도연화의 것.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그 길만은 명확했다. 도연화는 후회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도연화, 에필로그3